Ⅰ. 즉위와 사람 됨됨이
Ⅱ. 왕권 강화 추진
Ⅲ. 익산으로의 천도 추진
Ⅳ. 경제기반의 확대
Ⅴ. 실지양단의 외교책
Ⅵ. 무왕의 정치적 한계와 민의 부담 가중
요약
무왕은 백제 제 3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00-641년까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서 법왕이 즉위 이듬해에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무왕은 선화공주와 결혼함으로써 무왕은 백제 지배층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동시에 신라와의 긴장관계도 해소되었다. 무왕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익산경영을 추진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의미에서 천도를 추진하였다. 그에 따라 왕궁리에 궁궐을 만들고 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그렇지만 익산으로의 천도는 단행하지 못하였다. 근래에는 사비도성을 정궁으로, 익산의 왕궁성을 이궁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무왕의 익산천도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비지역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천도는 단순히 수도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세력 사이의 역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고 따라서 천도로 말미암아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세력들은 강력하게 천도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무왕은 이들의 반대를 꺾지 못하였으므로 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무왕의 정치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익산으로의 천도가 좌절되어 한계에 부딪힌 무왕은 점차 정사에 흥미를 잃고 연락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익산 왕궁리에 왕성을 조영하고 미륵사를 창건하는 등 대규모의 사업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재원 충당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기준척의 변화이다. 종래에는 백제의 도량형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그 변화과정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에 부여 쌍북리에서 백제 자가 출토되었고 이 자와 같은 길이의 나무로 만든 용기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자료는 백제의 도량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단서가 된다. 민의 부담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무왕이 29cm자를 기준척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익산 왕궁의 조영과 미륵사의 창건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 때문일 것이다. 즉 무왕은 이러한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수취를 강화하여야 하였고 그 방법의 하나로서 기준척을 확대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기준척의 확대는 농민경제에 큰 부담을 안겨주어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