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三韓의 對中교류와 後漢尺의 유입
Ⅲ. 백제의 度量衡 통일과 東晋尺의 도입
Ⅳ. 南朝문화의 수용과 南朝尺의 사용
Ⅴ. 北朝문화의 수용과 수․당척의 도입
Ⅵ. 백제의 對中교류와 瑞山지역
요약
한반도의 중서부, 충남의 서북단에 위치한 서산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연맹체에 속하였다. 마한연맹체를 구성한 54국 가운데 致利鞠國은 음운상에서 볼 때 백제의 知六縣과 음운상 상통한다. 백제의 지육현은 현재의 서산시 지곡면에 해당된다. 삼한시기에 서산지역을 기반으로 성립된 소국은 치리국국으로 볼 수 있겠다. 백제는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기 시작하여 4세기 전반에는 전북지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하였다. 이점은 비유왕이 27년(330)에 김제에 벽골제를 축조한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이다. 이렇게 볼 때 서산지역의 치리국국은 빠르면 고이왕대에, 늦어도 비유왕대에는 백제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대중교역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교역의 거점지역이다.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었을 때 제 1의 교역 거점지역으로는 한강 하류지역인 인천․강화지역이었고 수도가 웅진과 사비로 옮겨졌을 때의 제1의 교역 거점지역은 금강 하류지역인 장항․군사지역이었다. 서산․태안지역도 백제의 중요한 거점 지역의 하나였다. 이 지역은 중국과의 교통이 빈번한 곳이었으며 백화산 정상부에 오르면 태안반도상의 연안과 여러 섬들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다. 이곳에 대외교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태안마애삼존불이 만들어졌다. 태안마애불이 조성되는 시기에 이 지역은 대외교역의 새로운 거점지역으로서 활기를 띄었을 것이다. 그 결과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서 대외교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고 중앙의 유력한 귀족들과 연계성을 가진 자들도 생겨나는 등 이 지역 세력들의 성장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망한 후 이곳에서 부흥군이 일어난 서산은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형성되고 있었고 이들이 흥망계절의 정신으로 떨쳐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산마애삼존불이 위치한 지역은 태안마애삼존불과 연관되면서 동시에 내륙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한다. 태안마애삼존불이 해양의 안전과 관련되는 祭場이라면 서산마애삼존불은 해양과 내륙을 이어주는 기능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내륙을 왕래하는 상인집단들이나 대외교역에 종사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또 안전을 담보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서 서산마애삼존불에 제의를 드리지 않았을까 한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