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개로왕의 즉위와 지배체제의 재편
III. 왕·후제의 시행과 지방통치의 변화
IV. 국정의 파탄과 한성 함락
V. 맺음말
요약
백제는 한성시대 후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국력이 쇠퇴하고 귀족세력이 발호하면서 왕권의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개로왕의 부왕이었던 비유왕도 對高句麗戰의 패전책임과 차기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정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개로왕은 즉위 후 백제의 대내외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전면적인 변화를 꾀하였다. 개로왕은 기존의 관등제를 근간으로 활용하면서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의 王ㆍ侯制 및 左ㆍ右賢王制를 수용하여 전제왕권을 지향하는 국정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개로왕이 전제적인 왕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461년 곤지에게 청병사의 역할을 부여하여 왜국으로 파견한 이후였다. 개로왕은 곤지의 渡倭를 계기로 국정을 완전히 장악한 후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어 동요하고 있던 지방통치 분야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개로왕은 담로를 지역별로 묶어 광역단위로 편제한 후 王ㆍ侯를 해당 책임자로 임명하여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다. 王ㆍ侯에 제수된 사람들은 중앙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세력 외에도 지방의 영향력 있는 토착세력이 임명되었다. 또한 지역별로 불균등하고 차이가 많았던 조세수취, 역역징발, 군사동원 등에 대하여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왕ㆍ후로 하여금 통제하도록 하였다. 또한 개로왕은 고구려와의 오랜 전란에 지쳐 있던 백성들의 민생안정을 위하여 전쟁을 자제하고 力役 부담을 줄였다. 개로왕은 국력이 회복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수세에 처한 상태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였다. 개로왕은 469년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 북방에 위치한 청목령까지 진출하여 실지회복을 이루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반격을 개시하여 장기전으로 치닫게 되면서 軍役 부담이 가중되고 가혹한 수탈로 이어져 민생이 파탄되기에 이르렀다. 개로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의 추진으로 민심은 더욱 악화되고 백제의 국력은 날로 피폐해졌다. 개로왕의 전제왕권은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기에 앞서 내외적인 모순이 격화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