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서 확인되는 진국은 이미 위만조선의 남쪽방면에 자리하여 중국과 교섭하였던 정치세력으로서 위만조선에 비견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마한 목지국의 진왕은 옛 진국지역의 전통을 잇는 유력한 정치세력의 지배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삼국지』한전에서 삼한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을 법하다. 한편 韓傳의 ‘마한’인식에는 진국 이래로 한군현 이남에 존재했던 하나의 세력권이라는 지역적 개념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마한의 역사적 실상과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백제본기의 온조왕 대에 마한이 멸망했음에도 이후 3세기 후반까지 마한의 실체가 확인되는 것은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 대에 멸망한 낙랑과는 별개로 4세기 초반 한반도에서 축출된 낙랑군의 사례에 비견된다. 곧 문헌에 보이는 ‘마한’인식과 그 역사적 실상은 구분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온조왕 대의 마한 병탄 기사에는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남쪽 방면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해 갔던 과정이 일부 함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마한은 國邑과 여려 ‘城’을 포괄하는 정치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목지국을 중심으로 주변 소국들이 결속한 연맹세력과 맥이 닿는다. 後漢의 세력약화로 서북한 방면의 유이민 파동을 겪는 2세기 중엽 이후로 백제국은 목지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백제가 마한 전역을 통합하는 것은 적어도 4세기 이후의 일이 되므로, 백제본기에 수록된 온조왕 27년의 마한 병합기사는 3세기 중반부터 진행된 목지국과 백제국의 경쟁, 내지는 伯濟國에서 百濟로의 전환과정을 밝히는 데에 유용한 자료로 취급할 수 있다. 3세기 중반에 벌어진 崎離營전투를 기점으로 백제국과 마한의 관계는 반전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백제본기에서 백제가 熊川을 넘어 ‘마한’을 공격하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때 마한의 실체는 안성천 이남에서 차령 이북지역에서 존재했던 아산만 일대의 ‘마한’세력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의 실질적인 세력범위와 서로 통하기 때문에, 백제본기의 마한왕은 『삼국지』한전의 마한 목지국 진왕과 서로 무관하지 않은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