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왕권세력과 백제전역
III. 660년 백제전역의 실현과정
IV. 맺음말
요약
무열왕대는 즉위 과정에서 보이는 알천 추대세력의 존재와 이후 왕권 강화과정에서 소외된 귀족연합세력의 불만까지 더해져서 왕권세력이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갖게 되었고 이를 대외 강경책으로써 희석시키고자 하였다. 전쟁에서의 승패여부는 곧장 국내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므로 왕권세력의 臨戰의 태도가 大耶城싸움과 달랐다. 따라서 왕권세력의 핵심인 歆運, 金庾信, 欽純, 品日 등이 백제전역에서 苦戰을 겪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자신이 속한 정치세력의 핵심 인적 기반조차 희생시켜서라도 승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기반이 군사적 성격을 갖는 것과 아울러 대외 강경세력으로서의 성격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국지전이었던 백제전역을 전면전으로 확대하였던 것은 신라의 전쟁 주도세력의 정치적 목적도 개재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眞德王2년 춘추의 대당외교로 사실상 백제전역이 결정 났으나 그 약속이 10여년 동안 실현되지 못했는데, 그 원인으로는 唐이 고구려를 직접 침략하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데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국내 사정에 기인한 바도 크다. 신라 정치세력의 역관계에서 왕권세력이 전쟁을 확대하는 데에 귀족연합세력의 협력과 호응을 기대한 사회․정치․군사적 사전 조치가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무열왕 4년에 있었던 천재지변에 따른 사회․정치적 동요도 백제 전역이 늦추어지게 된 한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 내의 동정을 파악하여 호기를 노렸던 데에도 기인한다. 대당외교의 정보 장악을 통해서 왕권세력이 大唐請兵 使臣의 회보의 내용과 시기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무열왕은 동왕 6년 10월 때를 맞추어 대당청병 사신을 귀족회의 중에 맞이하여 당 태종의 청병 승인을 대내외에 공포하고 더 나아가 당 태종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의 삼국통일전쟁을 정당화하고 반대세력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정치적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시사해 주는 長春郞 ․罷郎기사는 왕권세력이 백제전역을 일방적으로 이끌어가기에는 전쟁 전 정치세력의 역관계가 그들에게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