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금석문과 백제의 문자기록 체제
1. 한자 수용과 문자 기록의 전개
2. 금석문의 구성요소와 인명표기 방법
3. 금석문 제작자의 지위
Ⅲ. 七支刀와 대왜 외교
1. 年號의 문제
2. 대왜 외교의 성격
Ⅳ. 맺음말
요약
백제의 문자수용 과정이나 기록문화의 전개 과정 등을 살펴보고 칠지도의 기록내용에 반영된 대왜외교의 한 측면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백제에 한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한군현과의 교류 관련 기사 등을 통하여 볼 때 건국과 거의 동시기인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백제에서 금석문의 제작자 중 최고 전문가인 노반박사의 품계는 7품 將德이다. 이들은 관등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문 사용 능력과 같은 식자적 자질과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인명표기 방법은 ‘출신지역+인명’의 구조가 일반적이며 ‘지방성명+부명+관등명+인명’의 순으로 표기된 사례도 나타난다. 이러한 표기 방법이 정형화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진흥왕순수비의 기록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 문화가 고구려의 그것과 친연성을 가지는 반면, 신라 문화와는 차별화를 보이는 또 하나의 사례를 추가하는 것이다. 이어서 칠지도의 명문내용을 검토하였고 칠지도의 연호에 해당하는 ‘泰□’가 중국 연호가 아닌 백제 연호일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배경을 충주 출토 ‘建興五年’명 金銅光背의 연호가 백제 연호일 것이라는 점으로부터 찾고자 했다. 칠지도의 명문 해석에서는 裏面 명문의 앞부분이 상호 대구를 이루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에 유의하여, 이 부분에 의미상 ‘칠지도 제작상의 어려움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 따라 “백제의 왕세자가 父王께서 맡긴 어려운 분부를 기묘한 방법으로 이루어냈으므로 이를 왜왕에게 보낸다.”는 내용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에 기초한다면 왕의 어려운 분부란 “철대도의 표면에 금실로 글씨를 새기도록 하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금상감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칠지도의 명문 내용에서 칼을 수증받은 주체는 왜왕이지만 칼의 제공 주체가 백제의 왕세자로 나타나고 있는 잠에서, 당시 백제-왜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역학 관계의 불균형 상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백제왕이 왜왕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로서 칠지도 전달의 과정과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요소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