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의 附論 <古代日韓關係史의 誕生>에서는 4세기 관계사의 前史로서 한반도 諸小國과 일본열도 諸小國의 관계를 개시케 하는 구심력으로서 B.C.108년에 금일의 平壤市 大同江 左岸地域에 설치된 前漢의 樂浪郡을 중심으로, 소위 '漢의 四郡'과 3세기 초에 낙랑군을 2分하여 황해도에 설치된 帶方郡의 2郡을 위치시켰다. 이 2郡에의 諸小國의 통교가 일한관계사를 그때까지의 인접지역간의 교류를 연쇄시켜 遠隔地間交流에로 進化시켰고, 그로 인하여 문물의 교류가 필연적으로 경제교류와 그리고 정치교류의 측면을 낳아왔다고 이해하였다. 本論은 <七支刀銘文>과 <廣開土王碑文>에 초점을 맞추어, 이 同時代史料의 해석을 통하여, 4세기부터 5세기로 이행하는 고대일한관계의 基本軸과 그 具體像을 고찰하였다. 이제까지의 여러 연구를 검토하고, '七支刀銘文'에서는 372年 봄에 百濟의 近肖古王은 東晋에 사신을 보내 '鎭東將軍領樂浪太守百濟王'에 책봉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이미 泰和 4年(369)에 동진에서 주조되어 있던 '百兵을 벽하는' 呪力을 가졌다고 祈念된 '七支刀'를 하사받자, 고구려와 興亡戰의 한가운데 있던 百濟王과 世子는 이 呪刀인 七支刀를 東晋으로부터 하사받은 국제관계의 의의를 倭王과도 共有하기 위해, 이것을 복제하고 그 경위를 裏面에 象嵌한 百濟製 '七支刀'를 왜왕에게 주었다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와 그 영향 아래 나아가는 신라에게 대항하는 백제와 왜국과 가라의 관계는 시대의 진행과 함께 서로 굳게 연결지어간 것이고, 그 관계의 하나의 정점을 전하는 사료가 '廣開土王碑文'이다. 여기에는 고구려·신라 vs 백제·왜국·가라의 기본관계의 굳히기와 바로 응하는 전개를 간파할 수 있다. 제3장에서는 동시대 사료와 중국사서에 기재된 古代 日韓關係史像과 후세의 編纂書인 ≪日本書紀≫와 ≪三國史紀≫의 關係史像과의 整合的인 이해는 가능한지 아닌지의 문제와 과제를 검토하고, 編纂史書 중에서도 ≪日本書紀≫의 숨겨진 史料性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기술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