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말~5세기초 광개토왕의 남진경략에 백제는 인질외교로 왜에 청병외교를 벌린 것이 유효하여 백제의 동맹세력으로 대신라와 고구려전에 출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 장기적 주둔하여 군사적 지배를 관철시킨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전지왕 즉위 과정에서 왜가 등장하는데 왜에 체류한 경험을 가진 전지왕이 즉위함에 따라 백제와 왜는 아신왕대에 이어 친왜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413년 동진과 왜의 교섭은 백제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졌다.
5세기 후반 곤지의 왜 파견, 동성왕 즉위과정에 나타난 왜의 역할 등을 통해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도 한편 왜가 나제동맹체제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백제와 암묵적으로 경쟁하려는 양면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5세기 말 동성왕대에는 백제와 신라 관계를 기존의 나제동맹체제보다 강화하는 수준에서 결혼을 통한 군사동맹관계로 한 단계 발전시켜나갔지만 왜와는 소극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왜 5왕 시대에 왜는 현실성 없는 작호를 요청하였다. 중국의 작호수여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이나 일정한 원칙하에 운영되어 백제를 제하였다. 현실성 없는 작호 요청의 이면에는 당시 왜왕권이 추진한 지배구조변화와 관련이 깊다. 왜왕 무는 송의 권위있는 장군호 수여를 통해 왜왕권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적인 지역 수장층을 서열화하여 왜왕권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