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고구려와 백제의 출계 인식
Ⅲ. 부여 계승 의식 속에서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 배경
Ⅳ. 맺음말
요약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에서 출원했다는 출계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많은 사료들이 뒷받침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兩國의 건국 세력은 부여에서 南下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 관련해 일본 측 사료에 보이는 都慕大王을 고구려 주몽왕으로 지목하는 견해가 많았지만, 동일한 『신찬성씨록』을 통해 兩者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로 명백히 드러났다. 부여 시조인 동명과 고구려 시조인 주몽 역시 서로 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말기에 왕실을 무력화시킨 연개소문 집권기에 주몽보다는 동명의 존재가 마치 建國主인 것처럼 크게 부각되었다. 고구려인들의 동명 후예 의식이 高潮되었고, 동명과 주몽을 等價値로 여기는 인식이 생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고구려 멸망 이후 어느 때 설화상으로 동질성이 강한 동명과 주몽, 양자가 결합된 모습으로 고려 초기에 편찬된 『舊三國史』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게재된 온조․비류설화 가운데 후대 생성된 온조 시조설화의 성립 배경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조 초기의 역사 편찬과 결부지어 보았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면서 전쟁을 통해 경쟁하던 배경을 부여로부터의 정통성 계승 의식과 관련지어 살폈다. 아울러 고구려와 백제 왕실의 最高神格의 祠廟인 동명묘가 각각 그 건국지에 건립된 배경을 이와 같은 선상에서 찾았다. 그런데 475년의 漢城함락 이후 백제 왕실은 동명묘를 상실했다. 538년 국호를 南扶餘로 바꾸고 사비성으로 천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시 동명묘는 부활되었지만 관산성 패전 이후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 이후 생겨난 夫餘系 神格의로 祠廟 仇台廟를 지목해 보았다.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 계승 의식은 후대의 발해왕조에서도 확인될 정도로 그 상징적 의미는 지대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