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漢山’과 그 관련 용례의 검토
Ⅲ. 근초고왕의 ‘移都漢山’ 표방과 王都의 확정
Ⅳ. 근초고왕대 ‘移都漢山’ 표방의 의미
Ⅴ. 맺음말
요약
근초고왕 때의 천도지로 전하는 한산은 고구려에 의해 한강유역이 함락될 때까지 백제의 王都로 이용되었다. 한산에서 한성이라는 명칭이 파생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성은 王城이며, 한산은 이를 포함하는 지역적 범주였다. 한산 이외에도 위례 역시 백제의 중심지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위례와 한산은 동일지역이 아니며, ‘移都漢山’이 거론된 이후 왕도의 명칭으로서 한산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한산과 위례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지명이며, 지역적 관계로 볼 때, 한산은 위례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한산은 원래 초고계의 신성지인데, 초고계와 연결된 근초고왕은 한산을 국가 전체의 신성지로 격상시키면서 천도를 표방했다. 근초고왕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즉위했기 때문에 ‘이도한산’을 표방함으로서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산은 온조왕 이래의 도읍지로 강조되기도 했다. 다만, 한산은 백제의 전통적 중심지였던 위례 내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도한산’의 기사는 한산을 왕도로 확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과거 수장층 출신의 귀족을 국왕권 아래에 편입시키면서 일원적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중앙에 대한 편제가 시급했다. 왕도에 ‘부’를 설치하여 행정구역을 정비한 것은 바로 이런 목표에서 추진되었다. 이와 함께 근초고왕은 귀족의 군사력 흡수, 『서기』의 편찬, 동진과의 외교교섭 등을 통해 왕권 중심의 귀족국가체제를 확립해 갔다. 한산의 왕도확정과 정비는 침류왕 때를 전후해 완비된 통치체제의 토대가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