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연구현황과 문제제기
III. 백제의 대산성 공략과 가야세력의 복속
IV. 기문의 위치비정과 백제의 영향
V. 맺음말
요약
전북 동부지역의 關防遺蹟 및 通信遺蹟을 고고학 자료에 포함시켜, 호남 동부지역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던 가야세력과 백제와의 力學關係가 어떤지를 살펴보았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일련의 정치적 불안을 극복한 다음, 동성왕 9년(487)에는 帶山城을 공략하여 다시 장악함으로써 가야지역으로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아직도 대산성의 위치비정과 관련하여 논란이 적지 않지만, 全北 鎭安郡 龍潭面 月溪里 山城이 문헌의 내용을 고고지리적으로 충족시켜 주어 대산성으로 비정되었다. 금강의 동부 지역권에 기반을 둔 가야세력은, 백제가 대산성을 공략한 이후부터 정치적인 색채를 띠면서 전북 동부지역으로 진출하는 6세기 초엽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된 것으로 보았다. 종래에 지명의 연구와 단편적인 고고학 자료만을 근거로, 가야계통 국가단계의 정치체인 己汶기 남원을 비롯한 섬진강 중류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었지만, 그것을 입증해 주는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섬진강 수계권에서는 백제토기와 가야 후기의 토기류가 섞인 상태로 출토되어, 무령왕이 농업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된 백제 백성의 別還地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고고학 자료와 사료의 비교 분석을 통해, 기문은 백두대간의 동쪽인 임천강과 남강 중류지역으로 비정하고, 아영분지와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상기문은 웅진기 때도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