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7월 멸망 직후에 일어난 백제부흥군은 664년 3월 사비산성 전투까지 계속되었다. 4년에 걸친 부흥군의 활동은 군사적인 무장투쟁을 기반으로 멸망한 백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부흥군은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동맹관계에 있던 고구려와 왜에 구원군 파병을 요청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고구려의 신라 공격과 왜군의 파병은 부흥군의 활동 폭을 넓혔고 군사적인 기반을 보완해 주었다. 부흥군 지도층은 백제유민들이 나당군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한다는 투쟁의지를 고취시켜 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을 대신해 왜국에 가 있던 왕자 풍을 귀국시켜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여 부흥군의 지도체제를 강화하고 백제유민들을 결집시킬 구심점으로 삼았다.
부흥군은 사비성에 주둔한 당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압박하였고, 신라로부터의 보급로인 웅진도를 차단하여 백제고토에 주둔한 당군을 고립시켜 곤경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당 고종이 백제를 포기하고 철군을 결심할 정도로 효과적으로 활동했다. 부흥군은 또한 당의 연이은 고구려 정벌과 이에 호응하는 신라군의 진군로를 중도에서 차단하였고, 웅진강 입구와 두량윤성에서 사비성에 주둔한 당군을 구원하러 가는 신라군의 앞길을 가로막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부흥군은 주류성과 임존성 등 지리적으로 험한 곳을 거점으로 성을 견고하게 쌓고 양식과 무기를 넉넉히 확보하고 농성하면서 당군과 신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지리적인 이점을 적극 활용하고 방어에 유리한 곳에 성을 쌓아 농성하는 부흥군의 군사운용은 나당군의 공세를 극복하고 장기적으로 항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당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보낸 구원군은 실질적으로 백제부흥에 필요한 만큼의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왜에서 보낸 구원군 역시 전투 능력이나 부흥군과의 연합작전 수행능력 등에서 기대이하의 결과를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부흥군의 고구려와 왜에 대한 청병외교는 일면 성공을 거두었으나, 백제부흥운동의 성공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는 부흥군의 지도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 옹립했던 풍왕이 오히려 복신과의 불화로 지도체제를 무너뜨리는 등의 상황과 맞물려, 결국 백제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