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520~540년대 대가야를 둘러싼 국제정세
2. 550년대 전반의 상황과 관산성전투
3. 관산성전투의 영향과 대가야의 멸망
맺음말
요약
550년대의 한강유역을 둘러싼 패권 다툼을 관산성전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6세기 중․후반은 어느 한 나라가 절대적 우세를 이루지 못하고 세력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의 실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대외정책이 추진되었다.
백제는 6세기 초부터 추진한 가야지역 점령정책이 신라의 개입으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530,540년대에는 경남 서부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었다. 530년대 신라는 탁순․탁기탄․금관가야 등을 병합하였다. 540년대에 가야와 백제는 두 차례의 임나 재건회의를 통해 가야는 신라의 침공시 구원해주겠다는 백제의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자 했으며, 백제의 군령․성주를 내보내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548년에는 고구려에 요청하여 백제의 독산성을 치게 했는데, 백제가 승리함에 따라 가야는 백제의 부용체제 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백제와 신라․가야 연합군은 55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는 상류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한강 하류유역을 수복한 직후 고구려와 신라가 제휴하여 백제를 압박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상쟁을 중지하는 대가로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553년 신라는 백제로부터 하류유역까지 빼앗아 新州를 설치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왕은 왕녀를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 신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신라는 능숙한 외교적 대처를 통해 세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해갔다. 성왕대의 백제는 통치체제의 정비면에서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한반도의 정세에 대한 판단과 대처가 부족하여 신라에게 많은 것을 내주고 말았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 성왕은 가야 및 왜까지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관산성전투는 성왕의 죽음을 불러온 대패였지만, 백제사회는 제도의 정비를 통해 체계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장치를 구축하였에 비교적 단기간에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야의 경우 백제와의 연합, 신라와의 대립이라는 550년대 대외정책의 기조가 가야 스스로가 설정한 것이 아니라 백제, 신라 두 나라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강하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가야세력은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여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