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Ⅰ. 卓淳國의 위치와 對백제·對왜 역할
Ⅱ. 백제의 대왜 교섭과 多沙城路 개척
Ⅲ. 백제의 신라· 加耶諸國에 대한 군사 활동
Ⅳ. 가라국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대립
맺음말
요약
4세기에 가야제국과 백제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4세기에 들어와 가야와 백제, 가야와 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정리하는 고리 역할을 한 것이 탁순국이다. 탁순국의 위치는 탁순국이 내륙에 위치한 나라라는 점, 가야7국의 기재순서에서 볼 때 비자발=창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사실, 구례산이 낙동강 동안에 있으며 창녕 화왕산에 비정될 수 있다는 점, 음운상에서 탁순은 대구의 옛 이름인 達伐과 상통한다는 점 등에서 미루어 볼 때 대구로 보는 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탁순이 가야제국 가운데 대왜교섭의 주체로 떠오른 것은 탁순국 자체의 성장과 더불어 낙랑․대방군이 멸망된 이후 왜가 한반도 내륙에로 눈을 돌린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백제는 처음에는 탁순국을 매개로 왜와 교섭을 가졌지만 곧 직접적인 교섭을 하였다. 이때 백제는 낙동강로를 이용하려 하였지만 신라의 방해로 힘들게 되자 섬진강로를 개발하였다. 이리하여 섬진강 하구의 하동은 백제와 가라의 대왜교역의 거점이 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왜와의 직접 교섭에서 백제는 왜에게 칠지도와 칠자경 및 철정 등 자신의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보여주었다. 이는 왜로 하여금 백제를 선진문물의 주된 공급처로 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고구려는 4세기 중반에 들어와 남진 정책을 추구하였고 이는 곧 백제에 압력을 작용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먼저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369년에 신라와 가야 및 영산강유역 세력에 대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라군을 격파한 백제는 신라와 형제관계를 맺어 고구려에로 기울어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가야 7국을 평정한 후 가야제국과 부형-자제관계를 맺어 백제의 영향권 아래에 두었다. 반면에 백제는 영산강 유역의 심미다례 세력을 격파한 후 영역으로 삼았다. 이는 마한지역을 모두 통합하겠다는 백제 왕실의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신라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백제와 맺은 우호관계를 버리고 친고구려 정책을 취하면서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신라가 백제의 유력세력인 사지비궤와 연통하여 가라국을 공격한 것이 그것이다. 백제는 가라국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라국왕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나라를 復國시켜 주었다. 이 과정에서 목라근자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이후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정책은 목라근자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