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면극의 기원설 중의 하나인 기악기원설을 축으로 기악무의 원류를 다음 세 가지로 대별하여 도출하였다.
첫째는 기존에 통용되어온 오나라 기원설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입각하여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기악무를 배워 전하였다는 학설이다. 둘째 서역기원설은 서역과의 교류 흔적을 다룬 논의로써 기악무의 기원과 전파과정을 통해 고대 연희에 있어 동아시아 보편성을 제고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셋째 기악의 원류를 한반도 내로 보려는 관점으로 백제 미마지가 기악무를 배웠다는 오나라를 고구려의 대방군지역으로 보는 입장이다. 또 기악무에 등장하는 취호와 한국 가면극에 등장하는 취발이와의 상호 연관성을 통해 기악무의 기원과 전승을 한반도 중심으로 논하고 있다.
기악무의 일본 전파와 전승을 다룬 3장에서는 일본의 문헌사료들을 주목하였다. 기악무와 관련된 자료로는 『일본서기』, 『교훈초』, 『악부록』등이 있다. 그 밖의 사찰의 재산관리 목록을 적어놓은 『자재장』이 전국의 유명한 사찰에 남아 있고, 또 일본 왕실 기록을 남기고 있는 정창원의 각종 문서, 불교 및 연극, 음악관계 기록들이 있다. 이 중에서 기악무의 기원과 전파에 관해서는 『일본서기』, 기악무의 연회절차와 내용은 『교훈초』, 기악무에 사용된 음악에 대한 내용은 『악부록』을 통해 알 수 있다.
7세기경 일본에 전해진 기악무는 쇼토쿠태자의 지원에 힘입어 전성기를 누렸다. 그 과정에서 기악무는 대표적인 사원악으로 정착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부가쿠와 산가쿠에 흡수되면서 예능화되었다. 특히 사루가쿠와 접목되면서 커다란 변모가 있었으며, 14세기에 소위 좌(座)가 생겨나면서 사루가쿠의 노가 성립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 전통가면극이 성립되게 된 것이다. 기악무의 원형 전승은 사실상 소멸된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최근에 기악무의 원형을 복원,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본은 기악무 관련 문헌사료와 함께 200여개가 넘는 가면들이 국보로 지정, 보존되고 있어 기악무를 복원, 재현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보다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인류의 오천년 문명사가 상호 다른 이질적인 문명 간의 만남과 교류의 역사로 집약되듯이 기악무 역시 적어도 동아시아권 내에서의 상호 교류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바, 이는 한중일 공동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악무의 원류가 어디에 있건 간에 이는 동아시아 각 나라에 파급되어 고유의 토착적인 연희문화와 접목되어 새로운 전통연희로 재창조되었다. 중국의 나희, 일본의 사루가쿠의 노오, 우리나라의 가면극 등이 바로 그 결정체들이라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