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韓國에서의 高句麗·百濟·新羅의 三國은 일방적으로 先進佛敎文化를 日本에 전해 준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5세기 이후 中國·韓國등의 국제사회에서 무르익고 있던 佛敎文化수용에 따른 사회발전의 단계를 6세기 후반에 들어 日本社會가 취하는데 交流史的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日本初傳佛敎의 受容基盤은 古代韓國人의 渡來人集團文化이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불교 수용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蘇我氏의 정치적 기반이 渡來人集團이었고 이들 渡來人集團의 樹木信仰등의 在來信仰이 佛敎를 수용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渡來人集團에 의한 佛敎受容의 형태는 蘇塗信仰등을 기반으로 佛敎를 수용한 百濟·新羅에서의 受容形態와 軌를 같이 하여 주목된다. 이와 같은 受容形態가 國神崇拜者인 物部氏등의 더욱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그러기에 한동안 日本初傳佛敎는 蘇我氏등의 私寺佛敎로 머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百濟는 日本에 처음으로 佛像과 佛經을 전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 僧侶나 造佛工 등의 기술자를 보내어 佛敎寺院의 기능을 다하였다. 이는 百濟가 日本社會에 있어 寺院의 기능, 佛敎의 宗敎的기능과 文化的기능을 확대하였다. 日本社會에 있어 寺院의 종교적, 문화적 기능이 점차 축적·확대되어 나가자 佛敎의 국가적 수용에서 高句麗와 新羅의 佛敎 수용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大化改新이후 佛敎를 律令 社會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思想體系라 생각하게 되면서 新羅의 彌勒思想과 ‘王即佛’사상을 수용하여 ‘聖德太子 곧 釋迦佛’사상으로 전개·발전시켜 나갔다.이 단계에서 日本佛敎가 國家佛敎로 지향하게 되면 그 수용의 기반이 初傳時代의 私寺佛敎와는 달리 日本의 開國神話를 바탕으로 新羅佛敎를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용의 기반이 달랐기에 이 단계의 新羅佛敎는 華嚴思想이 주류를 이룬데 비하여 日本佛敎는 法華思想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佛敎思想에 대한 선택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唐나라 등에 學問僧의 빈번한 유학에 新羅의 역할이 컸던 것임을 알 수 있다. 日本國家佛敎는 百濟보다 新羅佛敎를 수용했는데 이는 佛敎의 私傳에서 公傳에 이르는 과정이 新羅와 공통성에서 기인한다. 6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걸친 日本社會는 정치적으로 日本社會가 律令制度를 확립해 가는 시기요, 문화적으로 佛敎를 수용하여 國家佛敎로 발전시킨 시기였다. 이 때 日本佛敎는 古代韓國에 있어 高句麗·百濟·新羅佛敎의 영향과 지원 하에 발전되었다는 日本古代史의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