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와 황룡사는 8000여 평의 대규모 사찰이고 가람구성에 있어서 대탑의 조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창건시기가 7세기 전반으로 거의 같을 뿐 아니라 모두 온 국력을 기울여 조영되었다는 비슷함이 보인다.
본고는 두 사찰에 대한 비교검토 뿐 아니라 창건배경을 비교검토하여 사회상의 제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백제의 미륵사는 미륵상생신앙을 하생신앙으로 전개시킴에 의해 일어난 문화운동 내지 종교운동의 소산이었다 할 것이다. 미륵사상의 대중적 전개를 기한 것이다. 신라의 황룡사는 창건가람, 중건가람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가람조영에 두 단계의 문화단계를 거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미륵사상에서 화엄사상을 수용하여 전통문화의 포용과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였다.
미륵신앙의 하생신앙화는 진취적 변혁적 성격을 보인다.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의 무왕은 성왕, 법왕 등과 같이 미륵사의 신봉자이지만 무왕이란 시호를 붙인 것은 미륵사상의 하생신앙적 전개에 따른 진취적 업적의 표현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 화엄사상의 수용은 토착세력을 포용함에 따라 종래 왕실에 대한 신성관념이 희박해지고 대신 실질적 권력구조의 정상에 있게 됨을 대표한다. 여기 신라왕족의 성골 진골 구분이 있어 창건가람으로서의 황룡사는 성골에 의해, 중건가람은 진골에 의해 각각 건설된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백제나 신라는 미륵사, 황룡사를 통해 다 같이 문화의 목적성을 문화의 추진성과 만나게 됨을 기하나 백제는 목적성이 강한 반면 신라는 추진성이 강하게 작용되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