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사료로 보는 백제 대식제와 삼국의 구휼정책
2. 고대 동아시아에서의 백제 대식제
3. 백제 대식제의 성격과 한계
맺음말
요약
삼국에서 ‘대식제’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삼국 모두 등장하는 ‘진급(賑給)’ 기사와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이다. 진급 기사는 신라와 고구려의 경우 재해에 대한 진급과 진급 이외의 합이 50% 내외를 이루고 있어 재해에 대한 대응이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 한성기와 웅진/사비기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면서 전반적으로 재해에 대한 대응이 소극적이었다. 진대법·의창(義倉)·환곡(還穀) 등은 모두 무이자 또는 손실분의 보전을 위한 낮은 이자율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이자율을 보이는 대식제와 직접 연결시키기는 어려웠다. 역대 중국왕조 중 한대(漢代)나 손오(孫吳) 등에서 대식제와 유사한 제도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수대(隋代)에 처음 등장한 의창은 제도화에는 성공하였으나, 부족한 재정을 메우거나 지방관의 전횡 등으로 전용되기가 쉬웠고 재원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고대 일본에서 나타나는 진급과 의창은 모두 무이자로 중국왕조와 유사한 면이 많다.
좌관대식기 목간의 경우 ‘좌관’을 하급관등 소지자로서 대식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기에, 곡물 대여라고 하더라도 식량 지원뿐아니라 교환수단으로서 재화의 대여라는 측면도 고려해야 하였다. 고구려나 신라의 사례에서 삼국시대 차대(借貸)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기에 대식제를 진대법·의창)·환곡 등과 연결시키기는 어려웠다. 또 백제는 신라나 고구려와 달리 자연재해에 대한 대처에 소극적이어서 대식제가 자연재해 대처의 방편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적었다. 즉, 대식제를 통해 ‘고대적인 배려’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의창이나 환곡 등의 ‘중세적인 배려’에서 나타나는 운영상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재원의 확보와 운영상에서 나타나는 지방관의 전횡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조세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고, 지방관에 대한 장악이 상대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고대사회임을 고려한다면, 애초에 ‘고대적인 배려’가 제도화되어 작동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더라도 국가나 왕권의 입장에서 자연재해 등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경우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기에, 진급 등을 통해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고대적인 배려’가 제도로서 정착하지 못한 원인도 결국 고대사회의 한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대법·대식제 등의 순기능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고대사회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