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비 천도가 538년 성왕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서만 단행된 것이 아니라, 이전 왕들의 관심과 준비를 기반으로 진행되었음은 자명하다. 백제의 사비 지역에 대한 관심은 동성왕대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 사비 천도를 실천에 옮긴 왕은 무령왕이었다. 무령왕은 521년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대내외 선포하면서, 475년 한성 함락으로 어쩔 수이 옮겨 온 웅진에서 벗어나 국가중흥을 위해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그러나 523년 무령왕의 사망으로 이 사업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525년 성왕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성왕은 사비 천도를 원만히 진행하기 위해 법화사상을 받아들여 여러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였다. 그 결과 사비 초기에는 왕권과의 연계성 강화를 통해 지배세력들이 존재하는 형태였다.
사비 초기의 귀족세력은 왕권을 매개로 정치적 지위와 사회적 경제적 기반 등을 승습하였기 때문에 왕권 아래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비 초기 정치체제는 왕권을 중심으로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었는데, 특히 성왕대 국가기구 정비에 따른 관계·관직의 확충은 정치체제 안정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백제는 사비천도 이후 관직이 분화됨에 따라 개개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22부사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22부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6좌평제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이 22부사는 왕실의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내관 12부, 일반 서정을 담당하는 외관 10부로 나누어지고 있었으며, 내관 12부를 제외한 외관 10부의 장은 좌평이 맡았다. 6좌평이 외관 10부의 장을 맡게 됨에 따라 1인의 신료가 둘 이상의 관직을 겸대하는 겸직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좌평제가 관직 중심의 정치기구로 변화되고, 6세기 전반에 행정관서체계인 22부사제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성왕대 이후 귀족들의 정치적 기반이 관료조직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대성팔족이란 관료제적 조직이 정비된 이후 사회 신분적 측면에서 최고의 귀족가문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