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腆支王 卽位까지의 정치적 상황
3. 腆支王代 上佐平의 설치와 王權의 强化
4. 蓋鹵王代 王族 중심의 王侯制
5. 맺음말
요약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은 백제의 국내 정치에서도 격동의 시기였다. 먼저 대내적으로 침류왕의 재위 2년만의 갑작스런 사망, 이어서 나타나는 진사왕의 변칙적 왕위계승, 그리고 진사왕의 행궁에서 죽음 등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내분을 겪고 있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근구수왕은 태자 때에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즉위 이듬해부터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있다. 고구려와의 공방전은 진사왕대에도 계속되다가 왕 8년에는 광개토왕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아 북변의 요새인 關彌城이 함락되었다.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계속된 패전으로 야기된 위기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태자 직지를 인질로 파견하는 등 왜와 외교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아신왕 사후 설례 일파의 왕위 찬탈이 일어났을 때 전지왕은 국인으로 표현되는 반설레파 세력의 적극적인 지지로 이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 과정에 정치적 시련을 겪은 전지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상좌평의 설치였다. 따라서 전지왕 이후에는 왕권과 상좌평의 결합을 축으로 정국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국운영은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목만치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요소는 개로왕대에 취해진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들에 의해 보완되고 있었다.
개로왕은 상좌평을 중심으로 한 체제의 한계성을 보완하기 위해 왕족들을 권력의 전면에 등장시킨 왕․후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개로왕의 왕족 중용은 내부 분열을 일으켜 일부 귀족세력의 이탈을 초래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한 개로왕의 전사는 왕․후제를 근간으로 한 정치체제를 무너뜨렸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웅진 천도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