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예성강 주변의 지리와 교통로
III. 고국원왕의 예성강 하구 진출과 패퇴
IV. 광개토왕의 남진과 공격로
V. 한성공취와 금강 상류 진출로
VI. 맺는말
요약
고구려의 남진로는 언진산맥, 멸악산맥, 마식령산맥 등을 관통하는 고갯길과 예성강, 임진강 등 하천을 도강하는 방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중에서 주로 자비령로, 방원령로, 재령로 등 세 루트가 활용되었다. 특히 백제 공격에서 가장 활용도가 높았던 것이 자비령로이다. 반면에 신라 진출로와 관련하여 방원령로가 주목된다.
자비령로 방면의 남진은 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단계 목표는 예성강 하구 지역이었다. 이곳이 백제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369년 고구려는 자비령로로 남하하여 예성강 하구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백제가 요격하면서 패퇴하였다. 그 결과 백제가 예성강 유역의 관할권은 강화하고 자비령로에 대한 영향력를 확대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더구나 이후 평양성이 2번이나 공격당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집권 후 예성강 유역을 확보하기 위한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드디어 392년 예성강 하류의 요충지였던 석현 등 10성과 관미성을 공취하였다. 그 결과 예성강 유역에 대한 관할권은 물론 자비령로 및 서해의 수로도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임진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영락 6년 이후 방원령로를 통한 남진도 전개되었다. 먼저 예성강 중상류지역을 발판으로 영서지방을 공략하고 남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다. 영락 6년에 공취한 성들 중에는 이 지역에 속하는 것들이 있다. 광개토왕은 남진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후속 조치도 단행하였다. 즉 자비령로 따라서 7성을 축조하였고 방원령로를 따라서 6성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광개토왕 말년에 이르면 고구려의 남경은 임진강 북안까지 확대되었다.
장수왕 초년은 광개토왕 말년의 형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45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먼저 신라를 공격하여 고립시키려하였다. 이 때 백제는 고구려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가하고 예성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기습하여 점령 하였다. 장수왕이 치밀한 사전 계획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고구려는 백제를 웅진으로 내몰고 충주를 중심으로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구려군은 남한강의 수로 전체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중부 내륙 지역에서 군사적 활동 범위를 확대할 수 있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