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나제동맹' 성립시점의 재검토
II. '나제동맹' 성립기 가라국의 대외관계
맺음말
요약
본고는 5세기대 가라국의 성장과 대외관계 추이의 연장선상에서 의도된 것이었는데, 그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나제동맹’의 검토는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가라국의 성장발전기가 ‘나제동맹’의 기간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종래 ‘나제동맹’ 성립시점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문점이 없지 않아 결국 재검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재검토를 기반으로 가라국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나제동맹’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고찰하게 되었다.
먼저 ‘나제동맹’ 성립의 시점에 대해서 종래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433년설은 신라와 백제 간 ‘우호관계’ 성립이후, 고구려의 남진에 대해 각각 대응하는 점에 주목하여 ‘나제동맹’으로는 볼 수 없고, 다만 ‘상호불가침’ 협정정도로 이해하였다. 455년설에 대해서는 455년 기사 자체에 대한 신빙성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중원고구려비」의 존재와 『일본서기』 웅략기를 의식한다면, 허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455년 ‘나제동맹’의 성립 또한 상정할 수는 없는데, 455년 이후에도 470년대까지는 양국의 군사동맹은 보이지 않고 각각 대응만 있었음을 통해서 방증하였다. 그런 다음, ‘나제동맹’의 성립시점에 대한 대안으로 474년을 제기하였다. 즉 신라본기의 474년조 기사를 474년과 475년으로 분리하여 이해할 수 있다면 여타의 기록과 비교했을 때 야기되는 1년의 기년차를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475년 양국 간의 실질적 군사동맹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다음으로 ‘나제동맹’과 가라국의 대외관계의 추이를 언급하였는데, 5세기 후반 고구려 ‘남진정책’과 ‘나제동맹’의 대립구도에서 가라국의 대외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즉,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각각 나타나는 ‘고구려의 변장’과 ‘高麗의 한 군사’를 「중원비」의 ‘신라토내당주’로 비정했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소위 ‘기생반 반란’ 기사를 검토함으로써 가라국에도 그와 유사한 성격의 존재가 있었음을 상정하였다. 한편 481년 고구려의 신라침공 때 가라국이 신라에 구원병을 파견함으로써 ‘나제동맹’ 체제에 협력했고, 결과적으로 가라국과 고구려의 관계는 결렬되었음을 추정했는데, 이는 향후 6세기대 가라국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 신라와 백제 간 각축의 전조가 됨으로써 가라국의 대외관계 변화의 변수로 작용되고 있음은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