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 국권회복 운동의 개념 문제
III. 조국회복운동의 시기 구분
IV. 흑치상지와 지수신
V. 맺음말
요약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 한 후 조국을 회복하기 위한 항전이 번져 갔다. 이들을 ‘백제 부흥군’이라고 일컫는게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가 적확한 개념이해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조국회복운동의 시기를 다시 설정하였고, 아울러 그 과정에서 노선을 달리했던 지수신과 흑치상지에 대한 평가를 제기해 보고자 하였다.
먼저 백제인들이 망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한 항쟁을 ‘부흥운동’으로 일컬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처음 사용한 ‘백제부흥’의 ‘부흥’이라는 용어는 그 실체가 본시 황국사관의 본체인 『일본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왜가 임나를 재건해 준다는 명분 속에 부흥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왜의 역할과 종주국으로서의 위상과 관련해 사용된 용어를 백제 재건과 관련된 상황에서 다시금 사용한 것이다. 말할 나위없이 이는 일본서기적인 황국사관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백제인들의 국가 재건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부적절하다. 오히려 ‘興復’을 비롯해서 ‘조국회복운동’이나 ‘조국회복전쟁’등이 적합한 용어이다. 요컨대 이러한 용어는 ‘復國’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復國運動’이나 ‘復國軍’이라는 개념도 온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조국을 되찾기 위한 전쟁에 참여한 복국군은 ‘義兵’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복국군을 ‘의병’으로 일컬었던 전통은 일제 강점기 하의 민족주의 사학계열에서 비롯하였다. 백제 복국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중요한 의병운동의 시발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지수신과 흑치상지의 경우 단선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들 각자 주어진 조건 하에서 조국회복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한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흑치상지는 역사 기록을 남겨준 편에서 활약하였다. 게다가 무덤에서 나온 묘지석으로 인해 생애가 풍부하게 복원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수신의 조국인 백제는 물론이고 그가 망명한 고구려 역시 당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지수신의 삶은 제대로 조명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