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6세기 중반 이래의 백제 관직제도인 22부사가 내관․외관으로 구분되어 있는 기준과 그렇게 구분된 역사적 배경을 검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기존의 22부 직무에 대한 추정 중에서 17개 부에 대한 것은 동의할 수 있으나, 穀部․肉部․刀部․法部․綢部 5개 부는 곡부는 곡물(租) 출납 관리, 육부는 공선, 도부는 국왕 시위․군기류 관리, 법부는 왕족 관리․궁내 의례, 주부는 직물(調) 출납 관리로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관 12부와 외관 10부의 직무를 통해 볼 때, 그 구분기준은 왕에게 근시하는가 여부였다. 실제로 내관은 왕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궁정관사와 일반국정에도 관여하는 궁정관사 이외의 근시관사로, 외관은 내관 이외에 일반국정을 담당하는 관사로 구성되었다. 특히 내관 12부에 곡부․외경부가 포함된 것은 근시관사의 국정 참여를 보여주는 백제의 특징이다.
백제의 내관․외관은 모두 중앙관인데, 그와 관련되는 내외 개념은 5세기 후반 궁궐을 기준으로 하던 것이 6세기 중반에는 근시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또 궁내와 궁외에 위치하면서 중국왕조에서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내조․외조의 개념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러한 내관․외관의 개념은 그 구분기준과도 일치하고 있다. 그 성립시기는 백제의 최상위 행정조직이 22부사라는 형태로 정비된 시기와 같다고 판단된다.
백제의 내관은 측근의 정치세력화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개로왕대 가신적 성격이던 근시관이 동성왕대의 발전을 거쳐 성왕대에 내관이라는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관 12부의 설치시기는 성왕대 이전으로도 볼 수 있지만, 개로왕 이전까지 소급하기는 어렵다. 내관이 6세기 중반에 성립하게 된 것은 率系 관등을 가진 倭系․漢系 인물의 정치적 등장이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반면 외관이라는 개념은 내관이 설치되는 성왕대에 등장하였지만, 외관 10부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중국왕조의 사례를 볼 때 내조적 관직이 처음 등장하는 개로왕 이전부터 외관 10부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외관 10부의 모체가 고대국가의 회의체라는 점에서 그 상위에는 좌평회의와 같은 의결기관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검토 결과, 내관으로 결실을 맺은 측근의 정치세력화과정이 왕권의 강화과정과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특히 22부사 성립 이후 왕권의 기반이 제도적으로 내관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의 정치 전개는 내관의 강약에 따라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양상은 중앙정치에만 국한되는 한계를 가졌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