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이 즉위하게 된 과정과 즉위 이후 무왕이 익산을 중시하여 어떻게 경영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무왕 즉위의 전제가 되는 위덕왕대의 정치상황을 보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위덕왕 14년을 기점으로 왕권이 강화되어 점차 국왕중심의 정치를 유도했다는 견해와 위덕왕 45년 즉위 기간 줄곧 국왕권이 미약하여 혜왕과 법왕의 단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필자는 후자의 입장에서 위덕왕대 45년 기록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위덕왕대는 천문관측 기록을 제외하고는 백제 자체 내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위덕왕이 45년을 즉위했지만, 남길만한 기록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역시 백제의 외교관계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백제는 북제에만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곧 이어 북제가 북주에게 통합되었다. 이어서 백제는 북주에게 사신을 파견했으나, 북주는 곧 隋로 바뀌게 된다. 수의 등장 이후에도 백제는 남조의 陳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수는 진 평정 백제 축하사절에게 매년 입공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 이것은 수가 백제에 대해 점잖게 꾸지람하는 것이었다.
무왕의 즉위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삼국유사에 실린 서동설화이다. 이 설화에 대한 연구성과는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창작인가를 구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단지 혜왕과 법왕의 즉위과정을 통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무왕이 즉위했을 것이다라는 추측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629년 즉위한 무왕은 익산을 매우 중시했다. 무왕은 610년경에 연동리 석불을 조성하고 629년경에는 미륵사를 완공하였다. 639년 이전에는 제석사도 만들었다. 그리고 불에 탄 제석사에서 나온 유물도 익산에 다시 모셔졌다. 무왕은 사비를 비롯하여 웅진․익산에 돌아가면서 거주했었던 듯싶다. 무왕의 익산에 대한 애정은 효도깊은 의자왕대에도 이어졌다. 익산이 무왕과 의자왕대에 걸쳐 중시되었다면, 익산은 아마도 백제 수도중의 일부, 즉 6部의 하나로 여겨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