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백제의 가야 지역 경략
1. 기문에 대한 간섭 및 영유
2. 대사 진출
3. 백제의 남한지역 진출
II. 가야제국의 대응
1. 백제의 기문 영유와 대가야연맹의 대응
2.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
요약
475년 熊津으로 천도한 백제는 동성왕대와 무녕왕대를 거치면서 중흥을 도모하게 된다. 이 시기의 백제의 관심은 전라도의 남부해안지역 및 동부산간지역, 나아가서는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러한 백제의 남방경략 정책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기문(己汶)과 대사(帶沙)지역으로 진출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百濟는 516년까지는 己汶을 완전히 점령한 다음, 섬진강을 남하하여 대사(帶沙)를 공격하였다. 반파국(伴破國)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연맹(大加耶聯盟)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522년까지는 이미 대사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사(帶沙)에까지 백제가 진출하게 되자 가야제국(加耶諸國) 전체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가야연맹의 맹주국 대가야(大加耶)는, 신라와의 혼인동맹을 통하여,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고, 백제의 진출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신라는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하여 大加耶聯盟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라측의 의도로 말미암아 522년에서 529년에 이르는 加耶와 新羅의 짧은 혼인동맹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후 대가야연맹은 백제가 기문과 대사 등을 영유한 현실을 인정하고, 백제와 타협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흠명(欽明) 2년(541) 4월조에 大加耶聯盟에 속하는 加耶諸國들이 백제조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때부터 백제와 대가야연맹에 속한 加耶諸國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흠명(欽明) 13년(552)까지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