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니식진묘지명』의 判讀文과 니식진 가문
III. 웅진성과 禰氏 가문
IV. 백제 멸망기 니씨 일족의 向背
V. 니식진의 생애
VI. 맺음말
요약
중국에서 소개된 「니식진묘지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식진 가문은 웅천 즉 웅진성에 기반을 둔 토착 세력가였다. 무왕대 니식진의 祖와 父가 모두 좌평에 이르렀을 정도로 니씨 가문은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니식진 가문은 무왕대 한수유역 회복이라는 국가적 숙원 사업과 익산 천도 이후 환도와 결부된 사비궁 중수라는 2차례의 중차대한 국가적 사안과 결부되어 있었다. 즉 웅진성을 매개로 한 2차에 걸친 국가적 사업 속에서 이곳의 토착 호족인 니씨 세력은 왕권과 연계하여 급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종전에 웅진성의 토착 세력으로 비정해 왔던 백씨 세력은 실상 이곳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권력에서 밀려난 소외된 세력을 왕권 강화 차원에서 적극 기용했던 무왕은 신진 세력으로 니씨 세력을 적극 끌어 당긴 것으로 밝혀졌다. 니씨 가문은 웅진성의 陵域을 관장하였기에 이와 관련된 니씨를 얻은 것으로 추측하였다. 백제 멸망기에 2명의 니씨가 보인다. 웅진성에서 의자왕과 함께 항복한 大將 니식과 역시 동일한 장소에 설치되었던 唐의 軍政機構인 웅진도독부의 요직에 있었던 니군을 꼽을 수 있다. 니식은 ‘大將’으로, 니군은 비록 백제 멸망 이후이지만 좌평으로 기록에 보인다. 이로 볼 때 무왕을 이은 의자왕대의 니씨 가문 역시 상층 귀족으로서의 위세를 여전히 유지했던 것이다. 웅진 도독부의 실질적인 수반이었던 니군이 신라에 억류됨에 따라 웅진도독부는 해체의 기록에 서게 되었다. 이로써도 백제 멸망기와 국가 재건기에 있어 니씨 가문의 위상과 역할을 그릴 수 있었다. 615년(무왕16)에 출생한 니식진은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 연령이 46세였다. 이 무렵 그의 官歷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묘지명의 比喩와 唐에서의 관직을 놓고 볼 때 그는 백제의 무관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니식진이 웅천 즉 웅진성 출신으로 기록에 보인 점을 주목하였다. 즉 니식진은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항복할 때 인솔했던 웅진방령군의 방령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백제 멸망 이후 니식진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묘지명에 인용된 典故를 놓고 볼 때 唐에 항복하여 당 조정에서 근무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당 조정 禁衛 군대의 대장군으로활약하다가 공무수행 중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산동성 룡구에서 사망한 니식진의 유해는 종실과 고관 및 훈신들의 장지인 지금의 서안시에 소재한 고양원에 묻히는 예우를 받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