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삼국사기』 개로왕기 도림 기사와 도미전의 검토
III. 도림 기사의 사실성 검토
IV. 개로왕의 집권과 지배체제의 정비
V. 맺음말
요약
『삼국사기』 개로왕 21년 조 末尾에 적힌 도림 기사는 『삼국사기』 도미전과 내용이 연결되는 것으로 밝혔다. 양자는 설화적인 서술일 뿐만 아니라 개로왕대와 한성 일원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내용 전개는 개로왕이 간첩승과 아녀자의 꾀임에 빠지는 우둔한 군주라는 데로 모아진다. 또 그로 인해 국정을 파탄에 빠뜨리고 한성을 상실했으며, 자신도 敗死했다는 일종의 교훈적인 내용으로 귀결되고 있다. 양자의 내용은 8세기대 한산주도독으로 부임해 와서 이 지역의 풍물과 지리ㆍ전설을 담았을 김대문의 『한산기』에 수록된 것으로 밝혔다.
도림이 470년 경에 백제로 망명하여 토목공사를 부추겼고, 심지어는 472년에 北魏에 보낸 국서까지도 그가 작성했으리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이 국서에 보면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 관계로 백제는 토목공사를 단행할 여유도 없을뿐 아니라 그런 발상 자체도 나오기 힘든 현실이었다.
개로왕 정권의 2인자인 곤지는 정로장군 좌현왕으로 『宋書』에 등장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기재가 11명의 除授 귀족 가운데 2번째로 적혀 있다고 해서 백제에서는 우현왕이 좌현왕보다 높은 지위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백제 역시 좌현왕이 우현왕보다 높은 직위임을 입증하였다. 우현왕 餘紀는 對중국 관계를 관장한데다가 太子였기에 제수 귀족 중 맨 앞에 대표격으로 적힌 것으로 파악되었다. 軍君이라는 別稱에 걸맞게 곤지의 渡倭 목적은 請兵에도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열도 내 백제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흡수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 곤지의 渡倭를 추방설의 입장에서 보는 견해를 부정하였다.
장수왕의 한성 공략 목적은 무리한 후계 구도 설정과 관련한 왕족들의 거센 반발에 대한 반작용적 성격을 띠었다. 이때 고구려 왕족 가운데 北魏로의 이탈자가 발생했지만 동시에 백제로의 망명자들도 나왔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고구려 역시 백제로부터의 망명 귀족들을 포용하고 있었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등을 통해 백제 내정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또 이들을 백제 침공의 前面에 내세움으로써 백제로 이탈한 고구려 귀족들의 존재를 상쇄하고자 하였다. 게다가 백제 출신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으로 하여금 개로왕의 面相에 침을 뱉게 했다는 것은 상징성이 큰 행위라고 하겠다. 백제인으로 하여금 백제왕을 응징하게 하는 것이었다. 곧 백제왕의 부도덕과 不法을 백제인으로 하여금 폭로하게 함으로써 고구려 원정의 정당성을 찾고자 한 행위였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