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稿에서는 中國의 北朝와 韓國의 三國時代 異姓王 濫封현상에 주목하여 양자를 比較하였다. 먼저 胡族이 주축이 된 北魏와 胡族 및 胡化된 漢人이 주축이 된 北齊의 爵制 運營 狀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北魏前期와 北齊時期 皇族이 아닌 異姓 신하들의 王 濫封現狀이 두드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筆者는 王 封爵者의 출신을 檢討한 결과 北魏와 北齊시대 部落首領이 대거 王에 封해졌음을 發見하였다. 이는 北魏와 北齊의 支配層이 皇帝와 對等했음을 시사하며, 漢人王朝에서 簒奪者에게만 허용했던 王爵을 異姓臣下에게 下賜한 것은 이들 胡族, 혹은 胡化된 漢人(北齊의 경우) 支配層의 要求가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皇帝들도 臣下들의 勢力을 認定하면서 이들에게 ‘中國式으로’ 적절히 대우해줄 필요가 있었는데, 이는 王爵의 授與로 象徵化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異姓王 濫封은 遊牧國家 匈奴와 柔然, 稽胡, ‘破六韓拔陵 政權’과 葛榮政權에서도 發見된다.
이어서 百濟에서 君主이외에 臣下들이 王에 封해진 例가 發見된다. 右賢王[餘紀], 左賢王[餘昆], 面中王과 都漢王[姐瑾], 阿錯王[餘古], 邁盧王[餘歷], 邁羅王[沙法名], 벽中王[贊首流] 등 8개의 王爵이 보인다. 王·侯에 封해진 이들을 分析하면, 百濟는 王族과 주요 貴族들을 王과 侯로 封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百濟는 有力한 王族과 貴族들의 代表者에게 君主와 同級인 王이란 爵位를 주었을 것이다. 즉 百濟人들에게도 ‘王’은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또 이는 三國時代 新羅에서도 確認된다. 1989년 3월 慶北 迎日郡에서 발견된 「冷水里碑」에는 至都盧葛文王(智證王)과 村·部·小國의 首長을 의미하는 ‘干支’, 즉 六部의 代表가 ‘王’으로 竝稱된 점은 당시 新羅人들이 6部의 首長을 중국의 ‘王’과 同一視했음을 의미한다. 즉 新羅人들은 中國의 ‘王’을 우두머리를 뜻하는 ‘干’, 혹은 ‘干支’와 同一視했을 것이다. 이러한 現狀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匈奴·柔然 등 北方의 遊牧國家와 中國의 일부를 점령한 北魏·北齊 및 北魏末 葛榮政權 등 胡族政權에서 보이는 現狀이었다. 반드시 一般化할 수 없지만 中國의 周邊民族들이 中國文物을 受容할 때, 中國의 制度를 그대로 受容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政治的 狀況에 맞게 바꾸어 受容하는 便宜的인 態度를 지녔던 國家나 政治體가 있었음을 確認할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