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개로왕대의 정치상황과 熊津 奠都의 배경, 그리고 웅진초기 귀족세력의 동향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개로왕은 전제왕권을 추진하면서 이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성을 쌓고 누각을 장려하게 조영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계략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개로왕의 무리한 대규모 토목공사는 국가의 人的․物的 자원의 고갈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강이북지역 재지세력의 분열과 이탈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북방지역 방비체계의 해체를 가져와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결국 한성의 함락과 천도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문주왕은 즉위 후 바로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는데, 웅진에 定都하게 된 배경은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大姓貴族들의 정치적 간섭을 최소화하고, 나아가 倭로부터 원군과 함께 귀국하는 昆支의 지원을 고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웅진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백씨세력과의 정치적 관계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치적 간섭을 고려하여 금강 남안으로 도읍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문주왕은 전통적인 漢城貴族이면서 재지기반의 상실로 인해 군사적 기반은 미약한 해씨세력인 解仇를 병관좌평에 임명하여 병권을 맡김으로써 금강유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귀족세력들의 군사력을 제어함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적 간섭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동시에 문주왕은 왜에서 귀국한 곤지 등 왕족을 중용하여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강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문주왕의 이중적인 왕권강화정책은 해구를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결국 해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실패하였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