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지역은 삼국중 백제가 가장 먼저 차지하였다. 웅진과 사비시대 초기까지도 청주지역은 확실한 백제의 영토였으며 담로가 파견되었다. 백제 당시 청주지역의 지명은 상당현 또는 서원이 아니라 낭비성이었다. 고구려는 5세기 말에 장수왕이 청주북부와 동부지역까지는 진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실제로 청주남부에 진출한 것은 성왕 때인 529년 무렵이지만, 미호천과 청주 주변의 방어성들에 막혀 청주지역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신라도 5세기 말에는 청주 남부와 동부지역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와 충돌하였으나 청주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5세기 말 이후에도 청주는 여전히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대치하는 삼각점이었다. 신라가 청주지역을 점령한 것은 김유신이 649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였다. 백제는 도살성 전투의 참패 이후 부모산성에 있던 좌평 정복이 투항함으로써 청주지역을 상실하게 되었고, 신라는 국경의 전진기지인 沙羅之停을 부모산성에 두어, 660년 백제 정벌시 중간기지로 삼았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새로운 지방행정조직을 설치하였는데 청주지역에는 소경을 설치하였다. 청주지역은 지리적․정치적인 이점을 가진 곳이고, 옛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를 견제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군사적인 요새지였기 때문에 인구가 희소하였을 것이고, 지역주민들의 성향도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진골귀족인 김원태를 사신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왕경인과 고구려 유민들이 사민되어져 민호를 충실히 하였다. 왕경인들은 서원소경에 대한 토지 개간권과 같은 경제적인 특혜를 받았을 것이고, 사민된 고구려인들은 고구려 멸망 전인 666년 연정토와 함께 투항한 고구려인들과 고구려 멸망 후 귀부한 고구려 유민들이었을 것이다. 이는 청주 복대동 건물지 유적에서 고구려 연화문와당과 암막새 기와 등이 신라 통일기의 토기 및 기와들과 함게 출토된 사실로 증명된다.
소경이 설치된 곳은 무심천 동쪽과 서쪽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우암산성, 서쪽으로는 부모산성을 배후에 둔 지역이었다. 서원소경이 설치된지 4년 후인 신문왕 9년(689)에는 서원소경성이 축조되는데, 이는 청주지역의 거점성이 부모산성에서 서원소경성으로 옮겨간 것을 의미한다. 서원소경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상당산성이 유력하다. 상당산성은 통일기 신라에서 축성하였고, 경주와 신라의 중요한 지배거점성에서만 출토되는 “沙啄部”銘 기와가 출토된 곳으로 통일기 서원소경의 거점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