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한성백제의 국가적 당면 과제는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의 군사력만으로는 고구려에 대적할 수가 없어, 왜 및 가야와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강화해 갔다. 한편 한성시대 백제 영역 내에서 출토되는 동진계 청자의 분포는 동진과 백제의 교역 수준이 남달랐음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백제와 동진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매우 의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이 시기 동진과 백제의 관계가 정치적인 면보다는 문물 교역을 통해 양국 관계를 강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가 이루어진 427년 12월에 왕위에 오른 비유왕은 고구려에 더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해 비유왕은 신라를 고구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을 가동하여 신라와 434년 나제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동안 고구려와 신라에 포위되었던 백제가 동쪽의 포위망을 풀 수 있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가 하나가 되어 북쪽의 고구려와 대적하는 양상, 이는 백제 주도하의 고구려 고립화 외교정책의 성립이었던 것이다.
450년대 이후 백제와 신라의 군사동맹이 본격 가동되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를 깨뜨리기 위한 외교정책을 펴기 시작하였으며, 그 대상은 왜였다. 고구려는 신라와 왜 관계의 분리를 통해 백제-신라-왜의 전선을 와해시키려고 하였다. 자비왕 2년(459)·5년(462)·6년(463)에 왜의 신라 침략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고구려의 분리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왜의 신라 침략은 백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백제의 군사동맹국들인 신라와 왜가 서로 갈등을 빚는 상황은 백제 안보의 큰 위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로왕은 왜를 설득하기 위해 백제 조정의 2인자인 곤지를 461년 왜에 파견하였다. 개로왕은 461년 곤지의 왜 파견으로 백제-신라-왜의 전선을 와해시키려고 했던 고구려의 분리 정책을 무산시켰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의도를 무산시킨 자신감과 지배체제의 정비를 바탕으로 즉위 15년(469)에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개로왕은 469년 고구려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이후에도 대고구려 강경책을 계속적으로 추구하였다. 이는 개로왕이 18년(472)에 북위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 내부 정세의 변화, 그리고 고구려와 송과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면서 북위로 하여금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가장 적절한 시기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대북위 외교는 북위로부터 거절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결국 한성 함락이라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