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중국·고구려·신라의 "보"계 관명
III. 온조왕·다루왕대의 좌·우보
IV. 고이왕대의 우보
V. 맺음말
요약
백제 左․右輔는 16관등제가 정비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최고 관직의 명칭이다. 좌․우보의 존재는 고구려나 중국에서도 확인되므로 이들을 살펴보면 백제의 좌․우보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천자를 보필하는 四隣의 하나 또는 황태자를 보좌하는 관직으로 좌보가 확인되는데,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이 외 漢대에 수도 방위 및 경기 지역 통치책의 일환으로 京輔와 함께 좌․우보의 三輔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수도를 중심으로 좌․우의 통치 및 경제적․군사적 문제를 책임지던 지역 및 그 治民官을 부르던 말이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大輔 및 좌․우보가 모두 확인된다. 이들 좌․우보는 왕의 측근으로서 “軍國之事”를 위임받아 왕의 政事에 적극적으로 간여하는 재상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군사적 성격 또한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경우 좌․우보는 보이지 않고 “군국지사”를 위임받은 大輔만 확인되며, 이는 당시 토착계와는 구분되는 세력에 붙여진 명칭이었던 듯하다.
백제의 좌․우보 관련 기록은 온조왕과 다루왕대에 5건이 보이고 약 200여년 간 나타나지 않다가 고이왕대에 다시 나타난다. 특히 처음 왕의 族父 을음이 우보에 임명되었던 것은 왕의 인척이 왕권을 보좌하는 초보적 형태의 관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백제의 우보는 특별히 “兵馬之事”를 관장했다고 하므로,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점은 部名을 관칭한 우보 및 좌보에서도 확인된다. 이들은 한성을 둘러싸고 북쪽과 동쪽의 방위를 책임지면서 그 지역에서 경계를 맞대고 있던 낙랑 및 말갈과 교전하였다. 이시기 백제 좌․우보는 在地에서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이 대보가 아닌 우보와 좌보로 편제되었다는 점을 보면, 일찍부터 왕권과 밀착된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명칭상 좌․우보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그 지리적 중요성과 군사적 특성, 치민관의 성격 등이 漢 長安의 통치를 담당했던 三輔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구려의 좌․우보도 고구려 초기에 최고관직으로 기능하였다는 점과 왕의 측근으로서 군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백제의 좌․우보와 비슷한 면을 지닌다.
고이왕의 즉위 이후 우보는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즉 고이왕 대에는 우보가 등장하기 전 좌장이 따로 설치되어 병마사를 위임받았으므로, 우보는 본래의 역할을 좌장에게 내어주고 왕에 대한 정치적 자문 및 의견수렴의 역할을 했던 듯하다. 좌․우보는 실질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左將보다는 兵官佐平의 성격과 유사했을 것이다. 이들은 古爾王 27년 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특히 兵官佐平과 계기성을 가지며 흡수, 소멸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