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이래로 한반도 지역은 오키나와를 매개로 동남아시아 세계와 직․간접으로 교류하고 있었다. 5세기 후반경에 접어들어 백제는 탐라 즉 제주도를 정치적으로 복속시킨 후에 북큐슈와 오키나와 및 남중국의 福州를 잇는 항로를 확보하였다. 백제는 탐라를 장악함에 따라 그간 고구려가 장악하여 북위에 조공품으로 보냈던 珂를 확보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백제는 항로를 동남아시아 세계로 연장할 수 있었다. 6세기대에 접어들어 승려 겸익이 중인도 즉 중천축까지 항해하여 범본의 불경을 가져 왔다. 이러한 대항해는 단순한 구도의 열정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백제로부터 인도와 인도차이나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바닷길이 열려 있고, 조선술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왕족인 흑치상지의 祖先들이 흑치에 분봉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겸익의 중인도 항해를 기록한 『미륵불광사사적』의 기사에 의문을 제기한 논문의 맹점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흑치의 소재지를 예산으로 지목한 견해가 지닌 고증상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갔다. 흑치의 위치는 명백히 지금의 필리핀 군도가 맞다는 사실을 숱한 문헌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가 지금의 캄보디아인 부남국과 교역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백제는 ‘使人’이라는 공식 사절을 동남아시아 제국의 일원인 崑崙과 접촉시킨 사실이 포착되었다. 즉 백제는 필리핀 군도를 통과해 그 보다 훨씬 원거리에 소재한 인도차이나반도 제국들과 교류하였다. 백제가 동남아시아 제국과 교류한 사실은 물증을 통해서도 밝혀졌다. 가령 백제가 남방 조류인 鸚鵡를 왜에 선물한 것은 물론이고, 무령왕릉 출토 태국제 무티사라 구슬의 경우를 꼽을 수 있다. 의자왕이 왜의 권신에게 선물한 木畵紫檀碁局의 자단목은 원산지가 스리랑카이며, 바둑돌은 상아였고, 모서리에 그려진 여러 필의 쌍봉낙타는 서식지가 몽골 지역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보이는 봇짐을 지고 코끼리에 올라탄 사내의 모습은 백제와 동남아시아 제국간 교류의 일단을 躍如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제는 동남아시아 제국 뿐 아니라 사막 건조 지역인 몽골과도 교류했을 정도로 그 활동 반경과 무대는 가위 현대인의 상상을 뛰어 넘었다. 이것이야말로 국제화된 백제의 활동 공간이요, 또 그러한 풍토 속에서 국제적인 문화가 조성된 것이다. 다양한 외국인들이 거주하였고, 동아시아 세계 물류의 결집처로서 대국 백제의 위용은 이렇게 하여 갖추어 졌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