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百濟국가의 발전과 그 국제환경
Ⅱ. 武寧王과 그 시대
Ⅲ. 백제문화의 국제성과 독자성
요약
초기 백제의 역사는 마한사의 일부로 파악된다. 백제가 한강유역 일대의 여러 소국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중국 군현을 상대로 한 246년의 항쟁이 아니었을까 보고 있다. 이때 8개 소국 연합군은 대방군 기리영으로 쳐들어 갔는데 이를 진압하고자 출동했던 대방군 태수는 전사하기까지 했다. 당시 한인 국가의 맹주가 누구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古尒王인 것처럼 기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백제는 4세기 초까지 안정을 유지하지 못한채 동요했다.
이 같은 위기상황에서 등장한 비류왕(304~344) 때는 동아시아 역사의 일대 변혁기였다. 낙랑․대방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고, 백제는 이제 고구려의 남침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시기 등장한 근초고왕은 이에 맞서 훌륭하게 국가를 保衛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백제의 전성기는 근초고왕의 뒤를 이은 근구수왕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 개로왕대에 고구려와 우호관계였던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장수왕을 비방하며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대규모 침략을 유발시켰다. 결국 개로왕은 斬殺당했고 웅진시대가 개막했다.
백제가 이와 같은 침체와 혼돈의 밑바닥에서 벗어나 회복 국면에 접어든 것은 무령왕 때였다. 무령왕은 고구려를 상대로 당당히 맞설 만큼 국력을 회복시켰고 신라와 대가야를 ‘이웃의 작은 나라’쯤으로 지칭할 정도로 성장했다. 무령왕의 치적은 군사적 측면 뿐 아니라 활발한 대외 교섭의 추진과 이를 통한 문화교류에 있어서도 주목된다. 백제는 인접한 신라를 비롯해서 중국 남조의 양 그리고 왜국과의 화친에 힘썼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직면해 있던 백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령왕은 양과의 교섭에 있어서 중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문화적인 면에 큰 의의를 두었는데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백제만의 독특한 의장을 엿볼 수 있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국제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다름아닌 무령왕릉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사회 내부에 장기간에 걸쳐 풍요한 마한지역을 배경으로 한 뿌리깊은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중국문화를 소화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전성기 백제문화가 중국 남조문화의 직접적 영향 아래 만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제만의 독특한 의장을 엿볼 수 있게 한 점에서 주목된다 하겠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