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성장한 한반도 중서부지역은 산천이 험하지 않은 데다 비교적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서식한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유적을 검토한 결과, 자연환경은 고금에 큰 차이가 없으며 지역별 차이도 크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인이 재배한 식물은 각종 곡물, 나물, 채소, 과일 등 다양하다. 자연 여건상 쌀, 보리를 많이 경작하고 섭취한 듯하다.
백제의 영토 안에는 산지, 평야, 하천, 바다가 모두 포함되었기 때문에 동물도 다양하였다. 포유류, 조류, 어류, 패류에 속하는 동물유체가 다수 수습되었거나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다만 중국 기록에는 백제에 거위, 오리가 없다고 하였으나 착오로 보이며 대륙붕이 발달한 서해안 때문인지 생활유적에서는 물고기와 조개류가 특히 많이 수습되었다.
백제가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서면서 쌀, 콩 등의 곡물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다. 곡물을 가공, 조리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찜, 죽, 밥이 많았다. 찜은 시루를 이용한 조리법인데 대략 3~4세기경부터 늘어난다. 시루와 짝을 이룬 백제토기는 원저장란형토기이다. 찜 요리가 늘어난 것은 농업생산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며 이는 동시에 정치, 사회 구조의 변화도 시사한다. 그러나 찜은 음식의 분량이 덜 불어나는 단점이 있어서 지배층 외에는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평민은 주로 죽과 밥을 지어먹었다. 생산량의 한계 등으로 인해 밥보다는 죽이 많았을터인데 곡물만 끓이는 죽이 아니라 아욱 등의 채소와 나물을 넣어 양을 불린 죽이었다. 죽을 끓일 때 아욱 등의 채소는 향신료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백제토기는 대체로 연질이기에 흙냄새가 배어나 별도의 향신료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제철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4세기에는 쇠솥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아직은 재료, 기술 등의 여건에 제약이 따르고 묵, 농공구 제작이 더욱 시급하였던 탓에 쇠솥을 사용하는 민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맞았던 탓에 백제에서도 육식을 장려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렵기사는 일단 육식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이 커진 6세기 중엽부터는 식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살생금지령이 선포되는 등 육식을 금하는 사회 분위기에 따라 채식을 널리 장려하였고 백제 사람들은 콩, 깨 등을 더욱 많이 섭취하게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