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인이 집단이주한 왜에 착수한 사업은 저수지, 답개척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였다. 이렇게 출발한 대화왜의 강역은 대화, 하내지역에서 시작하여 9세기 초 기내까지 넓혔다. 대화왜의 왕궁 구조와 규모, 왕도의 성격, 문서의 해독, 역서의 사용, 국정운영담당자 등의 시각에서 본다면 백제패망으로 인해 백제의 엘리트 망명객이 일본으로 망명한 시기부터 일본고대국가는 명실공히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그 전까지 주로 본국인 백제가 대화왜를 경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화왜를 경영한 백제가 패망한 이후부터는 불가피하게 독자적인 국가경영을 해왔는데 그 초기는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8세기 들어와서 일본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국가로서의 기틀이 잡혔다. 그러나 기내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의 국가강역 또는 자체의 인력과 수단에 의한 해외수송 등의 시각에 선다면 일본고대국가는 9세기 초 또는 그 이후에야 국가의 틀이 잡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화왜 사람들은 8세기까지 한복을 입고 김치 등 한국음식을 먹으며 한국말을 사용하였는데 이것들이 한국 것과는 다른 것 말하자면 일본의 것으로 서서히 바뀌어 갔는데 이 과정과 일본고대국가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땅에 기둥을 박아서 세운 집이어서 2,30년이면 썩어서 그곳을 떠나야 할 오막살이 왕궁에서 한 곳에서 오랫 동안 정착할 수 있는 규모가 큰 왕가의 왕궁의 정치체제로 바꾼 것과 또 천지 2년 이후의 모든 관립의 제정이나 전문적관인의 출현, 또는 율령 없는 국가에 처음으로 율령을 제정하게 된 것도 모두 663년 이후 백제로부터 대규모 지배층이 대화왜로 이주한 결과 필연적으로 생겨난 일대 발전이었다. 왕궁과 왕도의 성격의 시각이나 율령제의 시각에서 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고대국가는 7세기 말 내지 8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말할 수 있다. 응신시대에 백제인의 대화지역에의 대규모 집단 이주는 대화왜의 형성과 관련이 있고 백제멸망 후 대규모 백제 지배층의 대화왜 이주는 일본 고대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