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시대 초기는 왕족인 부여씨를 비롯하여 북부출신 해씨, 진씨, 동부출신 흘씨, 서부출신 회씨 등의 씨성집단이 보인다. 이는 부여씨가 경기도 일대에서 독립된 제부족세력을 통합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강력한 지방적 지배기반을 가져 왕실은 병마권을 위임하는 우보, 좌보의 관직을 주어 중앙의 지배권내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왕권은 미약하여 전임자가 사망한 후에야 타세력집단이 우보의 직을 맡는 등 왕은 그저 유력한 세력에 승인해줄 뿐이었다.
고이왕대에는 진씨세력이 크게 대두되어 왕실세력과 밀착하였는데 왕실에서 의도적으로 왕권신장을 위해 진씨와의 연합이 필요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비류왕~아신왕대에는 해씨세력이 중직을 맡은 유력가로 해씨 세력의 출현은 고이왕계가 물러나고 초고계가 즉위하는데 따른 일시적 현상이다. 이후 바로 진씨세력이 나타나는데 당시의 정치내부적상황에서 세력변이를 이룰만한 특별한 계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류왕 초기에는 기존세력에 저항감으로 일시 진씨 대신 해씨를 중용하였다가 우복의 모반 등 정국이 불안해지자 다시 진씨 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같이 비류 말년에 복귀된 진씨세력은 이후 6대동안 왕비족으로서 그 세력에 절정을 이루어 왕족과 함께 왕권강화, 지배체제강화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전지~개로왕대에는 전지왕 즉위와 함께 해씨 세력이 대거출현하는데 아신왕 사후 후계문제를 둘러싸고 지배세력 내 격변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설치된 상좌평제는 설치 이후 인물, 기능면을 볼 때, 이전의 내신좌평과 별 다른 차이를 발견할 수 없고 다만 관제의 제도적 완비를 기하기 위해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
웅진 초기 왕실과 더불어 남래한 해씨, 진씨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나 점차 동요가 일어나자 동성왕은 이들의 통제를 위해 신진귀족세력으로 왕권강화를 꾀하였다. 대표적 세력이 사씨 백씨 연씨이다. 사비시대에는 자료의 제약 때문에 그 변화에 대한 다양한 추적을 할 수 없으나 대체로 대성팔족을 비롯, 상당히 많은 성씨들이 지배체제 구성에 보이고 있다. 굳이 많은 신진세력을 동원은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는 왕권세력이 약화된 것이며 다좌평제, 좌평지위의 격하는 단순히 말기적 현상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