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歷史硏究의 体系
Ⅲ. 百濟初期史料에 대한 硏究動向
Ⅳ. 「三國志」 東夷傳 韓條의 성격
Ⅴ. 「三國史記」 百濟本紀 初期記錄의 성격
Ⅵ. 맺음말
요약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일본 학자에 의해 계왕까지, 한국학자에 의해 사반왕까지 기록이 불신당했고 이는 일본서기 초기기록을 불신한 일본고대사연구의 전통 내지 당시 학문적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병도는 고이왕부터의 기록을 신빙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한국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초기기록 불신 근거는 설득력이 없고 오히려 당시 사회의 1차사료에 가까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작성되었다고 믿어지기에 사료적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삼국지 한조는 편찬자가 직접 관찰하여 서술한 것이 아니며 중국인들의 필요에 따라 한 부분으로 쓰인 것이다. 이에 삼국지 동이전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두 사서의 기록은 초기백제사 연구의 기본사료를 제공하며 편찬동기, 목적은 다르나 동일시대 ,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서는 다루는 내용이 서로 다르기에 다른 면을 해명할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초기백제사의 줄거리를, 삼국지 한조는 당시 사회사, 대중국군현관계 등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가지고 초기백제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역사발전 대세 속에서 초기백제사를 재구성하고 얼마 안되는 기록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회체제에 대한 이론적 바탕이 있어야 한다. 또 고고학적 유물, 유적에 대한 보고를 활용하여 초기백제사 해명이 한층 용이하고 신빙성을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의 기후를 복원한 내용이 다른 지역의 기후와 일치하거나 고고학적 자료 조사 등 타학문분야의 지원을 통해서도 신빙성을 확인받을 수 있다.
두 사서를 이용하여 백제사를 해명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류학 등 인접과학의 이론을 수용하여 당시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