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 백제고지 지배를 위해 설정한 5도독부는 백제부흥군의 저항으로 탁상 계획에 그쳤고 다만 웅진도독부만이 군정 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백촌강 전투로 백제 부흥운동이 종식됨에 따라 그 이듬해인 664년 2월 당은 백제고지에 대한 통치 구획을 설정하였다. 그결과 당은 백제고지의 동반부에 대한 통치권을 신라에 위임하는 대신 서반부에는 웅진도독부를 중심한 7주 51현을 설치하였다. 이는 665년 8월 취리산회맹에서 신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을 도독으로 한 웅진도독부는 백제 멸망시 당으로 압송된 백제 귀족을 귀환시켜 요직을 구성하였으나 신라 압박으로 륭이 당으로 돌아감에 따라 유인궤가 관장하였다. 그러나 유인궤가 유배됨에 따라 이군이 웅진도독부의 실질적 수장이 되었으나 670년 신라 유인책인 고구려부흥군 토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신라로갔다가 억류된다.
한편 웅진도독부 관하 7주 51현의 운영은 웅산현령 상주국 사마 법총을 통해 알 수 있다. 웅산현은 노산주의 주현인 노산현으로 밝혀졌는데 금강 하류 익산군 웅포면에 치소를 두고 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대외교역의 창구였고 백촌강전투와도 무관하지 않은 지역이다. 이처럼 전략적 비중 높은 지역의 현령인 법총은 웅진도독부 대일본외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렇듯 웅진도독부의 실질적 운영은 백제계 관료들이 주도하였고 독자적이 활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웅진도독부와 일본의 외교적 교섭은 664년 2월 백제계 관료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목적은 고구려와 일본간의 군사적 동맹을 차단하는 외에 백제고지 바환약속을 당이 어긴데 다른 신라의 불만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에 파견된 웅진도독부의 이군과 곽무종은 신라의 일본침공설을 유포하여 고구려와 일본이 동맹을 맺어 당에 대항할 수 있는 국면을, 신라와 일본간의 전쟁을 유도하였다. 이로인해 일본은 북구주 지역 방위를 위해 664~667년까지 축성 및 봉수 배치의 대상은 신라였다.
668년 8월이후 웅진도독부의 실질적 통치자 이군이 670년 신라에 억류됨에 따라 신라의 기습공격으로 웅진도독부는 궤멸되고 일본에 청병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신라는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백제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시기는 종래 생각했던 문무왕 11년이 아니고 문무왕 12년으로 밝혀졌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