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백제의 오부·오방에 관한 연구이다. 금서룡에 의해 왜곡된 백제의 오부 연구방법은 말송보화의 신라 육촌, 육부 연구방법에 그대로 계승되는 등 일인 학자들에 의해 잘못 연구되었다.
필자는 백제초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전시대에 걸쳐 오부가 보이고 있으며 온조왕 31년에 남북부가 먼저 설치되고 33년 동북2부가 설치되는 것을 통해 설치운영된 5부는 천도에 관계없이 기능을 한 것으로 보여지는 점, 각종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늦어도 고이왕 27년 16관위 설정시부터 지방행정조직으로서 오부가 존재하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의 연대설정 견해를 표로 정리한 결과 왕도는 시종 오부라 한데 대하여 지방행정조직으로서는 오방과 오부의 양자를 모두 사용한 것 같다.
금서룡은 5부 가운데 상부는 동, 하부는 서, 전부는 남, 후부는 북으로 보았다. 그리고 오방의 위치를 중방 고부, 동방 은진, 서방 남원·순창·장성 이북, 북방은 공주, 서방은 불명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본인은 근거없이 오방성의 위치를 추정하기 보다는 부와 관련하여 같이 등장하는 우곡성, 사구성, 이산성 등의 위치를 밝히는 것이 오방의 위치추정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이들의 위치를 밝혀야 각 방성의 위치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금서룡, 김철준, 노태돈 등이 왕도의 오부제에 대해 언급하나 김철준, 노태돈만이 그 성립연대를 웅진시대로 보고 있다. 김철준은 왕도의 오부를 행정구역으로 보고있고 노태돈은 온조시대 제도된 오부는 부족으로 보고 있는데 대해 이 왕도의 오부는 지역구획으로 보고 있다. 한편 고이왕 이후 주요인명에 붙이는 부명이 보이지 않고 인명 위에 부명을 冠하는 것은 그가 자기의 부와 중앙정부에 이중으로 귀속되며 그의 현실생활이 자기가 속한 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백제의 오부 존재를 보여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