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서기 1세기의 전쟁 계기와 원인
1. 백제와 대립한 신라의 실체적 접근
2. 다루왕의 와산성 공격과 원인
3. 기루왕 때의 신라 화친 배경
III. 서기 2~3세기의 전쟁 지역과 결과
1. 진한 세력의 분열과 전쟁의 재개
2. 초고~고이왕 시기 접전 방향과 주체
IV. 맺음말
요약
『삼국사기』초기 사료에 의하면, 서기 1~3세기에 백제와 신라의 24회의 전투 중 무려 20회가 백제의 선제공격이었다. 이로 보건대 전쟁의 원인은 백제의 필요에 의한 것이며, 전쟁의 기본 성격을 고려하면 결국 백제의 성장과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처음 백제와 신라의 교전은 마한장수 맹소가 진한과 결탁하여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신라(진한)와 마한의 관계를 차단하려 하였다. 특히 와산성(보은) 쟁탈전은 백제의 동남방 진출을 엿보게 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주변의 구 마한세력에 대한 장악력만 훼손시켰다.
이후 양국은 고구려의 압력과 말갈로 인하여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113년 이후 60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를 계기로 백제는 마한과 진한 세력의 결속을 파기함과 동시에 마한 지역의 장악력을 높였고, 신라(진한) 지역에 침입한 말갈마저 격퇴함으로써 남한강 중․상류 지역에서 우위를 확보하였다.
나아가 개립경로(156) 및 죽령로 개통을 계기로 남한강 상류 일대의 진한 세력을 더욱 압박하였고, 이로 인해 진한 내부에는 상호간의 알력으로 길선의 모반사건(165)이 야기되었다. 길선의 백제 망명은 진한 세력에게 대백제 강공책을 구사토록 하였지만 백제의 방어 전략으로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백제는 초고왕 2년(167)에 신라의 2성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진한 또한 2만군을 동원하여 공격하였고, 신라(진한)왕이 기병 8천을 거느리고 남한강까지 진군하는 등의 위력 앞에 백제도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립령 개통으로부터 신라의 한수 진격까지의 기록을 통해 적어도 낭자곡성 진출 이후 꾸준히 남한강 일대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행사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초고왕 23년(188)에는 금강 상류역과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방향 전환도 가늠할 수 있다.
초고왕 23년 이후 백제는 모산성(의성), 구양(옥천) 등을 공격하였다. 이 때 백제와 대적한 주체는 미추계 김씨족의 선조인 구도로서, 커다란 활약을 보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양측은 기병을 동원함으로써 깊숙한 적진까지 공격하였다. 이 시기 백제와 신라(진한)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소백산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남한강 일대~금강 상류역이 거의 백제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 백제는 이미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일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대부분의 백제 공격이 실패하였던 점과 우두진 약탈이나 봉산성 공격시 신라군의 규모 등을 고려하면, 이 지역에 대한 군사 공격이 반드시 진출이나 점령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