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7월 18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예봉을 피해 달아났던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잡혀왔다. 신라왕 김춘추가 사비성에 도착한 후인 8월 2일에는 공식적인 항복식이 있었다. 의자왕은 백제의 왕족과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라왕과 당의 소정방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직접 술을 따라 올리는 수모를 당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전례에 따라 원한을 갚기 위해 의자왕을 처형하길 원했으나,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는 소정방의 주장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소정방은 당으로 귀환하기에 앞서 백제고토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1,900척의 대규모 선단이 순조롭게 귀환하기 위해서 황해에 태풍이 사라지고 순풍을 이용해 항해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9월 3일 의자왕과 백제포로들을 거느리고 사비를 출발한 당군은 썰물 때를 이용하여 신속히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계절풍을 이용해 황해 연안항로를 따라 북상한 뒤에 황해를 가로질러 산동반도의 봉래에 도착하였다. 당군의 귀환항로는 백제 원정항로를 역으로 거슬러 항해한 것이다. 봉래에서는 육로를 따라 당의 고종이 머무르고 있던 낙양으로 향했다. 의자왕은 봉래에서 래주, 청주, 치주, 제주, 운주, 복주, 활주, 정주를 거쳐 낙양에 도착했다. 사비에서 낙양까지는 거의 두 달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낙양에 도착한 소정방은 660년 11월 1일에 궁성의 정문인 측천문에서 의자왕과 백제포로들을 황제에게 바치는 獻儀禮를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의자왕은 고종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지만, 소정방의 주청으로 처형을 면하고 사면되어 그 자리에서 석방되었다. 하지만 老軀인 의자왕은 사비에서 낙양으로 끌려오는 동안 쌓인 피로와 처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등이 겹쳐 생긴 병으로 며칠 만에 죽었다. 의자왕은 백제의 신하들이 곡을 하는 가운데 낙양의 망산에 묻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