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당의 백제 정벌 목적
III. 취리산회맹 전야의 정세
IV. 취리산회맹의 목적과 과정
V. 맺음말
요약
당이 선택한 백제 고토 지배전략은 신라와의 군사적인 충돌 없이 신라군이 철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은 백제 고토를 손쉽게 직할영토로 편입하여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로 이용하고, 熊津都督府를 이용해 신라를 견제하기에도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당은 국가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중재하는 중국의 전통적 방식인 ‘會盟’을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먼저 백제의 扶餘隆을 熊津都督府의 都督으로, 신라의 文武王을 鷄林大都督府의 都督으로 임명하여 분쟁의 당사자들로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당 高宗은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후에 웅진도독부와 신라가 회맹하라는 勅命을 내렸다. 백제 고토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신라군의 주둔 자체를 웅진도독부와 계림주대도독부와의 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양자가 회맹하도록 한 것이다.
664년 2월의 웅령 회맹은 신라 문무왕의 참석 거부로 부여융과 김인문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회맹의 기본적인 목적이 영토 劃定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웅령은 오늘날의 충북 보은군 내북면 곰치이다. 웅령에서 회맹했다는 것은 결국 웅령으로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삼은 것이다. 당은 신라가 새로 점령한 백제 영토를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신라 문무왕은 이에 자신이 직접 회맹에 참여하지 않은 웅령 회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시 회맹할 것을 요구했다.
당과 신라는 웅령 회맹의 문제점을 조율하기 위하여 1년 반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하여 665년 8월 유인원의 중재로 취리산에서 문무왕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부여융과 다시 회맹을 하게 되었다. 당은 왜와 탐라 사신을 회맹에 입회토록 함으로써 신라가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외교적으로도 압박했다. 취리산은 오늘날의 충남 공주시 금강 對岸이다. 취리산 회맹으로 신라는 좀 더 나아진 조건으로 웅진도독부와 영토를 획정하게 되었다. 반면에 당은 신라의 백제 침탈을 막을 수 있는 근거를 확고히 마련했고, 백제 고토에 대한 직접지배를 본격화했다. 그리하여 백제 고토를 웅진도독부와 7주 51현으로 새로이 편제하여 항구적인 지배를 도모했다.
취리산 회맹으로 신라는 백제 멸망 이전의 국경선으로 경계를 획정하려던 당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신라가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백제 고토에 대한 영유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백제의 나머지 영토는 당의 기미부주로 편제되어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당분간 신라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