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삼국사기」에 보이는 익산
III. 왕궁리 유적·유물에 보이는 익산
IV. 관세음응험기에 보이는 익산
V.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보이는 익산
VI. 맺음말
요약
익산은 7세기대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유적 유물들은 무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백제 무왕대 익산은 백제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이를 문헌을 비롯한 여러 유물 유적 자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660년 당시의 수도인 사비를 진도성으로, 이에 익산을 가도성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 점은 흔히 익산은 무왕대에만 중시되었다가 의자왕대에는 돌아보지 않았다는 종래의 견해와는 다른 결론이다. 왕궁성 유적에는 원래 궁성 건물이 들어섰다가, 의자왕대에 이르러서 무왕을 추모하기 위한 원찰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자왕은 익산에 무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쌍릉을 만들어 여전히 수도의 일부로서의 기능을 유지시켰다. 관세음응험기는 사료적 신뢰가 높은 자료이다. 그러나 연호가 사용된 점을 미루어보아 자료 작성시기는 백제시기가 아닌 통일신라 초로 여겨진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의하여 미륵사는 639년경에 이르러서 완공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는 거대한 사찰이면서도 저습지에 만들어진 사찰이다. 이것이 건립에 오랜 세월이 소요된 이유이다. 미륵사 완공을 통하여 무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승격시키면서, 귀족들과 일반 민을 결집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왕은 즉위 초기 왕권을 강화하면서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신라 정벌을 계획하였다. 신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의 요지에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익산을 중시하였다. 이를 위하여 사씨의 정치적・경제적 도움을 얻어 익산을 별부로 지정하였다고 여겨진다. 무왕은 사비성을 중심으로 북방성인 웅진, 별부인 익산을 순환하면서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여러 자료를 통하여 무왕의 이러한 익산경영은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