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백제 무왕이 정국을 어떻게 운영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기록을 월별로 정리해보고 이를 유형별로 분류해 보았다. 이를 기반으로 무왕대의 주요 정치적 과제를 추출해내고, 이를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와 연결시켜 고찰하였다. 백제 무왕은 40여년을 집권하여, 이를 한꺼번에 살피는 것은 변화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워 사료상의 분위기가 바뀌는 즉위 31년을 기점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살피었다. 전반기에는 왕궁성과 미륵사를 축조하는 등 익산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행해졌다. 이때 무왕은 사씨의 도움을 얻어 여타 귀족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었다.
후반기에 들어 무왕은 왕흥사에 화려한 조경을 꾸몄으며, 사비궁을 중수하고 궁남지를 조성하는 등 사비에 집중적으로 토목공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무왕과 사씨는 점차 정치적으로 결별하는 느낌이다. 사리봉안기에 왕과 왕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도 왕비 중심의 기원이 행해지고 있는 점과 무왕 즉위 33년(632)에야 의자가 태자로 임명된 것 등은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자왕은 즉위 2년(642) 사씨인 국주모의 죽음과 함께 외가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했다. 또 의자왕은 금마의 왕궁성을 파괴하고 대관사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의자왕의 사씨에 대한 반발로 보여진다. 결국 무왕대 익산경영은 의자왕대에 이르러 그 중요성이 반감되었으며, 이것은 ≪삼국사기≫ 무왕조에 익산경영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못한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