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궁남지 목간의 내용과 성격
Ⅲ. 궁남지 목간의 ‘歸仁’과 ‘部夷’
Ⅳ. 맺음말
요약
본고는 부여에서 출토된 궁남지 목간을 소재로 그 용도와 성격을 고찰하고 나아가 목간에 나오는 귀인과 부이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이 목간은 서부 후항에 사는 丁2인과 中口4인, 小口2인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邁羅城 法理源에 畓 五刑을 분급받아 경작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들은 ‘귀인’ ‘부이’라 불린 외래계 출신으로 기존의 백제민과 구별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목간은 호적과 양안이 결합된 형태로 보아, 기록과 실제상황을 확인․대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파악된다. 즉 필요할 때마다 열람할 수 있으며, 현실과의 합치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대조의 기능을 가진 장부적 성격의 목간이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는 조세 징수라던가 군역, 요역 등의 징발 시에 확인 대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거주지로 추정되는 서부 후항 목간이 발굴된 사비도성의 행정편제구역일 수도 있으나, 신출토 목간과 인각와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지방의 거점 지역일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이 타당하다면, 지방의 거점지역은 목간에 나오는 지명인 매라성과 인접하여 있었을 것이다. 매라성이 옥구로 비정하는 견해에 따르면, 옥구와 인접한 지방의 거점성들 중에서 익산이 주목되었다. 익산이 별부로서 무왕대부터 운영되었고, 수도와 같은 행정구역이 편제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간에 기록된 ‘귀인’ ‘부이’의 의미와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기근이나 망명 등의 이유로 고구려, 신라, 왜 등에서 넘어온 외래계 사람들로 판단되었다. 기근이나 전쟁 등에 의해 유입되는 인구에 대하여 백제의 지배층에게는 이들을 하나의 範疇로 파악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고, 이와 같이 하나의 범주로 파악된 그들은 백제적인 천하사상을 지탱해주는 하나의 기제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백제사회 내에서 ‘귀인’ ‘부이’로 표현된 집단은 표면적으로는 백제의 율령법에 의해 지배받는 민이었으나 백제지배층 내부의 인식 속에서는 여전히 주변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구분되었다. 이것은 백제가 백제적인 천하관 하에서 이들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인식 태도에 있어서는 이중적인 잣대를 지녔던 백제의 폐쇄성이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