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6세기 중반이후 적대관계가 설정되었다.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독차지한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 관계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 빈번하지는 않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6세기 후반에도 7세기 초에도 여전히 서로 대적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된다.
백제와 고구려의 무력충돌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백제가 이전과 달리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으며, 회복한 한강유역을 독차지하고, 성왕마저 전사시킨 신라와의 원한이 백제로서는 더욱 다급하였을 것이다. 백제는 이러한 신라와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 고구려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였다. 그러는 한편 백제는 고구려와 서북 변경을 접하고 있어 고구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북조 왕조들, 그리고 수나라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7세기에 들어서면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대남 공세를 펴 나갔다. 이제 백제, 고구려 그리고 신라 삼국은 독자적으로 서로를 대적하였다. 본격적인 삼국각축의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이러한 삼국 각축 시기의 전개에는 신라의 국가적 성장, 이를 배경으로 하는 한강유역 확보와 그로 인한 중국왕조와의 직접 통교 가능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제 신라까지도 고구려와 백제를 대적하는데 중국왕조와의 외교관계를 이용하게 되었다. 신라가 국제적으로도 고구려 백제와 비등한 국가적 위상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수와의 외교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백제가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兩端策을 썼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양단책설의 근원인 『수서』 권81 열전 백제조 사료와 기타 관계 사료를 검토해 볼 때, 『수서』의 주장은 백제 양단책의 결정적인 증거로 삼기 부족하다. 또한 당시 정황상 백제가 고구려와 연화할 적극적인 필요성을 찾기도 어렵다. 백제가 양단책을 썼다는 것은 백제가 수나라의 고구려정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수의 입장에서의 해석이며 주장으로 생각된다.
백제가 신라를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고구려 견제를 수와의 외교를 통해 해결하는 등 백제와 신라,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 수의 관계는 서로 맞물려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무왕대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이들 관계의 연결고리와 연계 없이 별개로 존재한다. 즉 백제의 외교 범위에는 서로 다른 차원의 범위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