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일본서기』의 편찬과정에서 『백제신찬』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백제신찬』의 사료적 성격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백제신찬』의 편찬자 및 편찬과정 그리고 『일본서기』에 이용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백제신찬』은 7세기 후반 飛鳥戶造氏가 무령왕의 출생담을 중심으로 작성한 사서이다. 비조호조씨는 7세기 후반 자신들의 선조인 곤지에서 무령왕에 이르는 계보가 백제왕권의 정통이라고 주장하고자 『백제신찬』을 편찬하였다. 그 내용은 개로왕․문주왕․동성왕․무령왕의 즉위사정과 개로왕․곤지와 雄略王과의 관계이다. 『백제신찬』은 백제 왕력만 놓고 보면 『백제기』와 『백제본기』를 연결하는 사서라고 할 수 있다.
『백제신찬』과 『일본서기』 본문과는 무령왕의 출생담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왕명의 표기 및 무령왕이 계보에 대해서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일본서기』 본문에서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백제신찬』에서는 곤지의 아들로 나온다. 이러한 차이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자식이라는 계보를 가진 倭君氏의 家記가 『일본서기』 본문으로 구성되고, 이후 『백제신찬』이 참고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여겨진다. 왜군씨의 가기가 『일본서기』 본문으로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선광의 영향이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비조호조씨는 당시 천황가와 친밀한 유대관계를 이용하여 『백제신찬』을 『일본서기』에 싣도록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백제신찬』은 『일본서기』 편찬자료 이외에도 일본내의 백제계 후예 씨족들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동시에 백제계 씨족의 가기를 넘어선 백제왕의 계보까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던 것이다. 이에 가기가 아닌 『백제신찬』이라는 서명을 명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백제신찬』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편찬과정뿐만 아니라 백제멸망 후 백제계도래씨족이 일본에서 어떻게 존립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함께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