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4세기경 백제·가야·왜사이의 광역교역체계에 관한 고고학적 양상
III. 5~6세기경 백제와 왜사이의 교역체계 활성화와 재편되는 광역교역체계
IV. 결어-5~6세기 백제·가야·왜사이의 광역교역체계 재편과 그 배경
요약
이 글에서는 倭의 國家形成過程을 논하기 위한 기초작업의 하나로 3∼6世紀頃 百濟·加耶·倭 사이에서 이루어진 원거리교역의 변화양상과 그 배경을 분석하여 보았다.
3∼4世紀頃에는 한반도의 주요한 鐵생산지였던 낙동강하구의 加耶지역이 이들 3지역간 광역교역체계의 중심축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특히 鐵이라는 전략적 필수물자의 생산과 교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加耶지역의 廣域交易體系내 역할이 강화되는 시기는 樂浪붕괴전후로 보인다. 5∼6世紀頃이되면 4세기경까지 金官加耶와 倭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百濟·加耶·倭사이의 廣域交易體系에 再編이 일어난다. 이 시기의 주목되는 변화로는 3지역간 교역체계에서 百濟의 역할이 확대되고, 특히 百濟와 倭사이의 교역체계가 급격히 활성화되는 양상을 들 수 있다. 百濟와 倭사이의 급격한 교역체계 활성화는 양 지역의 政治的인 親緣關係 强化를 기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5세기경에 일어난 고구려에 의한 가야와 백제에 대한 攻勢와 백제의 漢城지역 首都함락과 웅진천도는 백제와 왜사이의 급격한 친연관계 형성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倭의 경우 백제양식의 횡혈식석실, 부뚜막시설과 시루를 이용한 취사·난방시스템 등 이 시기 확산되는 墓制와 생활문화의 변혁은 百濟와의 정치적인 친연관계 강화를 상징하는 고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百濟의 경우 백제 서남부지역 일부 수장묘의 묘제로 일시적으로 채택된 倭樣式 前方後圓墳, 百濟와 倭의 해상교역루트상에 위치하고 倭樣式 노천제사유물이 발굴된 竹幕洞祭祀遺蹟 등은 이 시기 倭와의 정치적인 친연관계 강화를 상징하는 고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5世紀頃부터 새롭게 변화하는 百濟·加耶·倭사이의 廣域交易體系는 정치경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간 武器武裝體系 革新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素環頭大刀의 경우 이 시기에 百濟加耶倭에서 공통적으로 柄部가 細莖형식인 72cm전후의 小形大刀와 79cm전후의 中形大刀가 성행한다. 이들 素環頭大刀는 刺擊時의 충격흡수에 유리한 柄部를 가진 개량된 형식으로 騎馬戰과 中武裝步兵戰에서 특히 위력을 발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백제와의 교역체계를 통하여 鐵素材 등 필수물자와 선진문물을 도입하였던 倭의 경우도 가야·백제와 더불어 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하고 기존 교역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시기 武器武裝體系의 革新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5∼6世紀頃 百濟·加耶·倭사이의 廣域交易體系 再編은 단순한 경제적인 교역시스템의 변화라기보다는, 첨단 武器體系의 교류를 포함한 정치·경제·군사 등 다방면에 걸친 포괄적인 교류를 강화한 새로운 교역시스템의 성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초록)